펜화로 만나는 평택섶길 풍경 11
두릉리 안재홍 생가
‘평택섶길’은 평택의 작은 길들이다. 16개 코스 오백리에 이르는 길은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수 곁에, 호젓한 숲에,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 유서 깊은 시내 골목과 재래시장에 이야기와 함께 짜여 있다. 섶길 여정에는 문화유산과 기념물, 역사 인물에 대한 테마들이 있다.
공직 은퇴 후 취미생활을 찾던 중 섶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필자는 평택에서 나고 자랐지만 섶길을 처음 걷는 날 곳곳에 숨어있는 경관이 놀라웠다. 그림 그리기에 약간의 소질이 있는 필자는 평택섶길 풍경을 펜화로 그려 간단한 글과 함께 평택시민신문에 한달에 한번 연재한다. 이번 연재를 통해 많은 분들이 섶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고장을 더 알게 됨은 물론 건강과 즐거움을 얻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황구지길 인근 두릉리 계루지 언덕엔 엄나무 고목이 서 있다. 나무는 두릉리 앞 벌판을 굽어 흐르는 해창강(진위천)을 내려다 보며 200년 풍상을 겪어왔다. 언덕 바로 아래 고즈넉한 터엔 한 채의 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독립운동가 민세 안재홍이 나고 자랐던 생가다. 초가지붕 안채에 바깥채가 골기와 지붕인 고택은 경기도기념물 제135호이자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 시설물이다.
‘펜화로 만나는 평택섶길 풍경’ 바로 옆란엔 ‘민세 안재홍 파워독서’가 연재되고 있다. 민세기념사업회 황우갑 선생이 싣는 글이다. 교육학 박사인 황 선생은 민세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이다. 그는 민세 정신을 전파하는 다사리포럼을 오랜동안 이끌어 왔다. 얼마 전 황선생이 안재홍생가를 그려볼 것을 권하며 책 두 권을 보내준다. 그중 ‘성인 교육자 민세 안재홍’은 황 선생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나 역시 민세 안재홍과 그의 정신을 늘 흠모했던 터라 다른 곳에서 구한 세 권의 책을 더해 모두 다섯 권을 공부 겸 정독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까지 발간된 민세 관련 서적은 총 백 권이 넘는다고 한다.
바다와 같은 민세의 사상을 감히 논하는 것이 외람되나 그림과 함께 독후감 삼아 몇자 적어본다.
‘민세(民世)’는 ‘민중의 세상’을 뜻하는 말이다. 동경 유학시절 스스로 지은 아호(雅號)다. 안재홍은 1891년 부친 안윤섭과 모친 광주이씨 사이에서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다. 예닐곱 때부터 집안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한번은 사기(史記)와 통감(通鑑)을 읽으며 사마천과 같은 인물이 되기로 마음 먹는다.(유소년기 이미 한학의 수준이 상당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부친이 구독하던 황성신문과 독립신문을 읽으며 기울어가는 나라를 걱정하는 조숙한 소년이기도 했다. 그는 17세부터 신학문을 배우고 20세인 1910년 와세다 정경학부에 유학한다. 월남 이상재의 권유에 의해서다. 이때 또래의 유학생이던 조만식, 송진우, 이광수, 장덕수 등과 교유한다. 1913년 학교를 휴학하고 상해, 북경, 심양 등 중국을 70여 일간 여행하면서 일본에 강점된 후 중국을 유랑하던 애국 동지들의 빈곤하고 무기력한 현실을 목격한다. 그는 이때 독립운동에 헌신하되 국내에서 민중들과 함께하기로 결심한다.
동경 유학 후 중앙학교 교감, 시대일보, 조선일보(주필·부사장·사장을 지냈다)에서 언론을 통해 다수의 논설과 시평, 역사서, 기행문을 쓰고 연재하며 민족의식 고취와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쓴다. 그는 20세기 초·중반을 통해 가장 많은 글을 쓰고 이를 언론에 발표한 인물로 알려졌다. 그는 과격하거나 폭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하는 비타협적 신념은 굽힘이 없고 당당하다. 그는 일제에 의해 아홉 번의 옥고를 겪는다. 고문과 수형생활의 숱한 고통에도 끝까지 훼절 됨이 없다. 그런 그의 성향은 비폭력 불복종운동의 마하트마 간디를 떠올리게 한다.
민세는 줄곧 민족통합을 강조했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해 통합의 시너지로 일제에 대항하고자 했고, 광복 후 좌우이념갈등을 해소해 통일국가를 이루려 노력했던 것이 그렇다. 안재홍은 온 생애를 통해 가엾은 민중들에 대한 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하며 민족통합을 우선하고 철저 항일과 민족통일을 실천했던 열린 민족주의자였다.
그토록 신념이 강한 그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고뇌도 드러난다.
1919년 청년외교단 사건으로 징역 3년의 수형생활 중 회고 내용이다. “1921년 가을의 초저녁이었다. 나는 그때 마침 일곱 살된 큰 아이와 다섯 살된 작은 아이를 집에 두고 한 3년째 못보고 있는 터였다. 그 아이는 어찌 되었을까? 이런 생각이 날수록 즐기는 독서도 안되었다. 취침의 명령을 받고 자리에 누웠으나 보송보송하게 긴장되어가는 눈은 잠이 올 생각도 안한다. 자정이 지나 새벽이 오고 날이 휘어밝아 기상의 명령이 날 때까지.. 선 하품으로 그 이튿날 하루를 가까스로 지냈다(‘동광’ 1931년 5월).”
감옥 속에서 문득 어린 자식들을 생각하는 한 아비의 마음은 가슴을 저리게 한다.
민세는 광복 후 민정장관(정부수립 전 임시 대통령 쯤)을 지내고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납북된다. 가족(부인과 세 자녀, 손주들)들과 생이별한 채였다. 민세는 1965년 3월 1일 평양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안재홍에게 1989년 3월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민세 안재홍 그는 세월이 흐른 후에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요즈음 들어 더욱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는 참 지식인이며 큰 스승이다.
올해로 23년된 민세기념사업회는 오랜기간 꾸준히 민세관련 학술연구활동을 해왔다. 이제 그 마무리 작업으로 민세의 고택 주변에 2025년까지 ‘안재홍 역사공원’과 ‘안재홍 기념관’ 건립을 추진한다. 건립추진위원회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1만명 추진위원을 모집하는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다. 성금은 건축 현상설계비에 반영한다고 한다. 필자도 기꺼이 한 구좌를 참여했다. 부디 계획된 사업이 잘 되어 민세 정신이 후세에 길이 전해지기를 소망한다. 고택 안마당 우물곁 민세보다 나이 먹은 향나무가 푸르르다. 3월의 하늘에 태극기가 펄럭인다.
평택섶길해설사
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