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화로 만나는 평택섶길 풍경 9
황구지길 회화마을
‘평택섶길’은 평택의 작은 길들이다. 16개 코스 오백리에 이르는 길은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수 곁에, 호젓한 숲에,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 유서 깊은 시내 골목과 재래시장에 이야기와 함께 짜여 있다. 섶길 여정에는 문화유산과 기념물, 역사 인물에 대한 테마들이 있다.
공직 은퇴 후 취미생활을 찾던 중 섶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필자는 평택에서 나고 자랐지만 섶길을 처음 걷는 날 곳곳에 숨어있는 경관이 놀라웠다.
그림 그리기에 약간의 소질이 있는 필자는 평택섶길 풍경을 펜화로 그려 간단한 글과 함께 평택시민신문에 한달에 한번 연재한다. 이번 연재를 통해 많은 분들이 섶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고장을 더 알게 됨은 물론 건강과 즐거움을 얻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용인 어비리에서부터 실개천을 모으며 내려오던 진위천은 적봉리에서 오산천과 만나서 회화리 해정들을 감아내려가 황구지천과 합쳐 흐른다. 평택섶길 7코스 황구지길은 그곳 두물머리에서 진위천을 따라 올라오다 회화리와 금암리 그리고 사리 매봉산을 넘는 길이다.
진위천 오른쪽에는 오산 에어베이스(K-55)가 있다. 미7공군사령부와 우리 공군작전사령부가 있는 이곳은 1952년 서탄면 적봉리·장등리·금각리 일대의 땅이 편입되어 비행기 활주로가 건설되었다.
100호가 넘는 큰 마을인 회화리는 조선 후기 해정들이 간척되며 생긴 단일 마을이다. 대부분 각처에서 모여든 소작농들이었을 것이다. 미군기지가 앉기 전 회화리는 서탄의 중간지점이었다. 동네 옆 진위천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경계점이었고 왕래를 하려면 강을 건너야 하니 그곳엔 나루가 있었다. 오랜동안 사람을 날랐던 육척 장사 홍춘성은 옛날 사공이었고, 노인회장 박흥락의 숙부 박준옥이 마지막 사공이었다.
동네에서는 여름에 겉보리 한 말, 겨울엔 벼 한 말씩을 추렴해 사례했다. 진위천변엔 넓고 흰 모래사장이 있었다. 단오와 백중 때 씨름대회가 열렸던 이곳엔 일제강점기 어느 날 군용기가 불시착했고 주변 농가의 멍석을 모아다 물을 적셔 깔아 이륙하는 일도 있었다. 이곳에는 전기가 일찍 들어왔는데 진위천에서 규사 채취를 하던 일제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넓은 들은 있었지만 그 시절 민초들은 대개 곤궁했다. 배고품을 면한 것이 불과 사오십년 전이니 그 혼란기의 가난을 누가 구제할 수 있었으랴.
차경환(82)은 33세부터 이장을 보았던 이곳 토박이다. ‘옛사람들이 그래도 정은 많았었다’며 회고하며 그는 자신이 본 것과 부친으로부터 들은 얘기들을 소개한다. 윤달이 드는 해 그 전해의 추석은 양력 기준 19일가량 빠르니 햇곡식이 미처 여물지 않는 시기다. 그때쯤엔 보리 한두 말 겨우 남겨 연명하는 이가 허다했다.
차태영의 작은 할아버지 차종완은 이른 추석이 오면 으레 머슴을 시켜 마당에 멍석을 펴고 쌀 너댓가마를 풀어 놓는다. 동네 어려운 이들이 명절에 떡과 쌀밥을 먹을 수 있도록 나누어주기 위함이었다.
나루 근처에 집이 넓었던 차병호는 단오 때 집 근처 참나무 고목에 그네를 매고 정월보름엔 넓은 뒤란에 음식과 널마당을 준비해 동네 부녀자들이 모여 놀게 했다. 그의 집 사랑은 해 저물어 나루를 건너지 못한 길손과 고단한 행상이 하룻밤 쉬어가는 곳이기도 했다. 그의 회갑 땐 사당패를 불러 마당에 놀이마당을 벌이고 온 동네가 먹고 즐겼다.
또 금암리 임광래의 부친과 내천리 조웅기의 조부는 아침저녁으로 굴뚝에 연기 안나는 집을 살피며 끼니거리를 나눴다.
그들은 이름난 큰 부자는 아니었으되 배고픈 설움을 아는 정 있는 사람들이었고 나라 기능이 없을 때 어울려 사는 나눔의 지혜로 사회를 지탱시켜준 사람들이다.
회화교회는 올해로 120년 된 평택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다. 1901년 초가집 예배당으로 시작한 교회는 1968년 장로 서강열이 대지 600평을 기증해 지금 자리가 되었다.
교회에서는 1945년 고등공민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며 교육을 통한 희망을 심어주기도 했고 6·25 때는 고아원을 열어 전쟁고아들을 구제했다. 평택지방 개신교회의 모태가 된 회화교회는 현재 최병찬 목사가 12년째 목회를 맡고 있다.
마을회관을 찾아간 날 차태영 이장, 박흥락 노인회장, 우영철 지도자가 함께 있었다.
마침 금속성 소음이 고막을 찢는 듯하다. 비행기가 착륙하는 소리다. 여름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란다. 동네사람들은 대화할 때 자동으로 목소리가 커진다. 그들은 관계기관에 마을의 이주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물안개가 강 건너 기지의 모습을 가렸다. 왕버들에 상고대가 않아 벚꽃이 핀 듯 환하다. 물위의 물새들이 한가롭다. 그중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