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서경덕 전 연암대학 학장
지치고 힘든 때 어른에게 연륜에서 우러난 조언을 청하다
코로나19로 지치고 힘든 이때 어른이 그리워진다.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한 마디 가르침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괜찮다, 힘내라”며 격려해주고 “이렇게 하면 잘 할 수 있다”고 알려줬으면 싶다. 늘 평택사람들과 함께해오고 겸손하게 배우려 노력해온 어른을 만났다. 푸른평택21, 민세기념사업회, 시민사회재단, 자원순환협동조합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온 서경덕(73) 전 연암대학 학장이다.
평생의 반이 넘는 40년을 살아온 평택을 아끼고 평택사람을 좋아하는 그를 만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평택의 미래를 그려나갈 조언을 들어보았다.
평택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1978년 서른살 때 평택과 연을 맺었다. 고향은 부산으로 6.25 전쟁이 나기 한 해 전인 1949년 태어났다. 이듬해 전쟁이 나면서 아버지가 낙동강전투에서 작고해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고려대학교 농과대학에 입학해 학업을 마치고 모교에서 조교를 하다가 연암축산대(당시 연암축산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평택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40년 전 평택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처음 본 평택은 황량했다. 도로 포장도 잘 안 돼 있고 합정동이나 비전동은 온통 논밭이었다. 처음에는 시내에서 전세로 살다가 장인어른이 퇴임하면서 마련한 고덕면 방축리 농장으로 옮겨가 주중에는 대학에 나가고 주말에 양계를 하며 살게 됐다. 첫째가 자라서 초등학교를 다니는데 논길을 걸어 통학을 했다. 길도 좁고 수로에 빠지기도 하니 안 되겠다 싶어 다시 합정동으로 이사했다.
대학과 집만 오가며 생활한 것인지
아니다. 동평택로타리클럽에 가입하면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양계를 하다 보니 동물약품 판매상을 자주 들렀는데 그 가게 주인이 자꾸 로타리클럽 가입을 권했다. 평택에 계속 살 거니 친구를 사귀어야겠다는 생각에 1986년 동평택로타리클럽에 가입했다. 가능하면 매주 수요일 주회에 참석했고 2년간 주보위원장을 맡아 주보를 만들었다. 1999~2000년엔 동평택로타리클럽 회장도 맡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처음엔 인사만 나눴던 사람들과 친구가 되면서 대인관계 폭이 넓어졌다.
사람 사귀는 것을 원래 좋아했는지
어릴 때는 그러지 않았다. 3대 독자여서 혼자 지낼 때가 많았고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만 했다. 그러다 대학교에서 동아리·학생회 활동을 하며 크게 바뀌었다. 당시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3학년까지 여름·겨울방학에 농촌봉사 활동을 다니고 야학 강사를 하면서 농촌의 미래를 고민했다.
연암대학 학장을 퇴임한 후 푸른평택21 회장을 맡았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학장에 재직하고 퇴임한 후 10년간 본격적으로 지역사회에서 일을 맡으면서 바쁘게 지냈다. 로타리클럽에서 친분을 쌓은 사람들이 일을 들고 자꾸 찾아오더라. 조정묵 시고쿠(四國) 조선학교 지원모임 공동대표와 박환우 평택환경행동 공동대표의 권유로 2009년부터 4년간 푸른평택21 회장을 맡아 환경 문제에 나서게 됐고, 원래 농업이 관심 분야다 보니 평택농업희망포럼 이사를 맡았다. 황우갑 민세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알게 돼 민세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맡아 민세 정신의 선양과 계승에 힘쓰게 됐다. 평택시민신문 후원회 부회장을 맡으면서 언론과도 인연을 맺었다.
최근 동평택로타리클럽 회장을 다시 맡았는데
로타리클럽 회원들이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줄고 있다. 30~40대가 여유가 없어서라고 본다. 코로나19 위기가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클럽 활동도 위축되고 매우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다. 그래서 위축된 클럽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회장을 역임한 역대 회장들이 다시 순차적으로 회장을 맡아 봉사하기로 하고 첫 번째로 제가 회장에 나서게 되었다.
평택의 크게 변화하던 시기에 지역사회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2002년 미군기지 평택이전이 확정되면서 삼성전자 평택공장, 고덕신도시 개발 등으로 평택이 크게 바뀌었다. 평택지원특별법이 제정되고 예산 지원이 대폭 늘었다. 갑자기 돈이 생겨선지 돈 쓰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평택시는혼자 계획을 세워 뚝딱뚝딱 짓고 주민들은 관심이 없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 푸른평택21 의장 재임 시절 소사벌택지 개발을 보면서 평택시와 LH에 국제도시를 만들려면 이래선 안 된다고 누차 건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평택의 정체성을 살릴 생각이 없으니 배나무를 다 베어내고 코딱지만하게 주차장과 도로를 만들었다. 용이동 개발을 하며 수억원을 들여 사람들이 다니지도 않는 육교를 세워 흉물로 남았다.
최근 평택의 변화에도 관심이 깊은지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우연히 평택역 앞 아케이드 건물을 없애고 광장을 만든다고 소식을 들었다. 젊은이들이 머물고 구도심을 활성화한다고 하던데... 평택역 주변 성매매집결지부터 통복시장까지를 확 바꾸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고 본다. 땅값이 너무 높아 개발이 어렵다고 하지만 성매매집결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 음습한 곳에 젊은 사람들이 오겠는가.
나무심기를 봐도 계획 없이 행사성으로 진행되는 듯해 안타깝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나무가 죽든 말든 관리를 제대로 안 한다.
무엇보다 우리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 큰 그림을 그리고 시민에게 제시하고 설득해야 한다. 시장이 현장에서 사람들을 직접 만났으면 한다. 앉아서 예산 타령만 하고 쪼물딱쪼물딱 해봐야 소용이 없다.
평택이 개발되면서 휴식·환경 등의 문제가 시민 관심사로 떠올랐는데
평택은 너른 땅이 있고 물이 많은 도시다. 반면 산이 없어 평택을 흐르는 물줄기를 잘 관리해 시민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인구는 점점 느는데 다들 갈 데가 없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외기노조 아파트에서 2년을 산 걸 제외하면 평생을 주택에서 살았다. 푸른 하늘을 보고 노을을 보며 살았는데 어느 순간 높은 아파트가 시야를 막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각박해지는 거 같다. 앞으로도 코로나19 같은 문제가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아파트가 늘어나는 만큼 사람들의 시야를 확 틔워줄 공간이 필요하다. 공장과 아파트만 들어선 도시는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떠난다.
민세기념관 건립에 힘을 쏟고 있다고 들었다
2025년 민세기념관 건립이 지역사회를 위해 할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한다. 평택시는 내년 기념관 건립 타당성 용역을 하기로 했고 LH는 기념관을 지어 기부체납하기로 했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사업이 주춤한 상태다. 이사회를 열지 못해 의견을 모으기도 어렵고 8월 13일 계획했던 학술대회도 열지 못하게 됐다. 조만간 만나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의논해보려 한다.
시민들과 민세기념관 건립의 의의·중요성을 공유하기 위해 설계비 1억원 모금운동을 하반기에 대대적으로 펼칠 계획이다. 더는 미룰 수 없다. 8월에 시작할 거다.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시대가 달라졌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너무도 개인적이라 시야가 좁아지고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거 아닌가 싶어 안타깝다. 이는 젊은이만의 문제라 여기기보다 앞세대가 모범을 보이고 알려주면서 함께 노력해줘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치우치지 말고 균형 있게 바라봤으면 한다. 좁은 시야로 눈 앞에 있는 문제만 보지 말고 길고 넓게 전체를 보면서 앞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길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