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숙제 주고 떠난 고 이선호씨 59일 만에 영면
유족-동방 19일 장례 하기로 합의 사과문 게재ㆍ재발 방지책 시행키로 여야 정치인, 노동ㆍ시민사회계 참석
“제 아이가 이 사회의 어른들에게 많은 가르침과 숙제를 주고 떠나는 것 같아 마냥 슬퍼할 수만은 없습니다.”
고 이선호(23)씨의 장례식에서 부친 이재훈씨는 이같이 말했다. 이씨가 평택항에서 산재사망 사고로 숨진 지 59일 만이다. 그동안 머리가 하얗게 센 이재훈(60)씨는 “두 달 동안 총칼 없는 전쟁을 치르다 보니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때로는 이 힘든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순간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2개월 동안 이름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내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고, 약해진 마음을 추슬러주고, 쓰러질 것 같은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워줘 버텨왔다. 여러분이 없었다면 오늘날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며 조문객들에게 큰절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아들의 죽음이 잘못된 법령을 다시 보고 고치는 초석이 된다면 아들을 이 땅의 노동계에 바쳤다는 자부심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살겠다”며 “제 아들 이선호 이름 석 자를 오래오래 기억해주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다시는 산재로 누군가 죽고 마음 아파하는
일이 없는 사회 됐으면
평택항에서 산업재해 사고로 숨진 고 이선호씨의 장례식이 6월 19일 오전 10시 안중읍 백병원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59일 만에 영면에 든 것이다.
장례는 유족과 고 이선호군 산재사망사고 대책위원회가 지난 16일 ㈜동방으로부터 사과문 게재, 재발 방지 대책 이행 등을 약속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준비됐다. 합의에 따라 동방은 6월 30일까지 중앙 일간지에 사과문을 공식 게재하고 유사 사고 방지를 위한 32개의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기로 했다.
이날 이씨의 친구들은 추모사를 통해 이른 이별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배민형(23)씨와 이철우(23)씨는 “드디어 차가운 냉동고에서 선호를 꺼내 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론 문득문득 떠오를 선호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다”라며 “다시는 산재로 누군가 죽고 마음 아파하는 일이 없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용탁(23)씨는 “어른들이 돈 몇 푼 더 벌어보겠다고 선호를 죽였다. 선호의 죽음을 끝으로 단 한 사람이라도 헛되이 일터에서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선호야, 나중에 천국에서 같이 술 한잔하자”고 말했다.
이날 장례식에는 여야 정치인도 참여해 이씨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더불어민주당 이탄희 의원, 국민의힘 유의동 의원, 정의당 강은미·배진교·심상정·장혜영 의원과 여영국 대표, 진보당 김재연 상임대표는 물론 평택지역 시도의원들도 참석했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 김미숙 사단법인 김용균재단 대표 등 노동·시민사회단체 관계자도 참석했다.
이들은 고 이선호씨에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다시는 이씨와 같은 일을 겪는 사람이 없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양 위원장은 “단 한 명의 죽음도 용납할 수 없기에 이선호씨를 보내는 오늘 다시 한번 이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싸워나갈 것을 다짐한다”며 “이제 이씨가 차별도, 착취도, 재해도 없는 세상에서 평안하게 쉬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여 대표는 “이씨의 아버지 잘못이 아니다. 안전장비 하나 없이 노동자를 사지로 몰아넣은 기업의 책임이다. 그런데 기업은 멀쩡하고 함께 일한 노동자만 처벌받는 구조”라며 “사람보다 돈과 이윤을 더 숭배하는 천한 자본주의가 만든 비극이다. 지켜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부디 편히 가기 바란다”고 말했다.
발인을 마친 후 유족들은 평택항으로 이동해 동방 평택지사 앞에서 노제를 지내고 이씨의 유해를 청북읍 서호추모공원에 안치했다.
이씨는 지난 4월 22일 평택항신컨테이너터미널에서 개방형 컨테이너(RFC) 위에 놓인 합판 조각을 치우던 중 300㎏이 넘는 FRC 날개에 깔려 숨졌다. 경찰은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동방 관계자 5명을 입건하고 이 중 3명에게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수원지방법원 평택지원은 지난 18일 이 가운데 지게차 기사 A씨에 대해서만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나머지 2명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