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전쟁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다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추구했던
소중한 울부짖음 ‘동학농민전쟁’
[평택시민신문] 올해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한 지 126년이 되는 해이다. 구한말 가렴주구와 학정, 억압과 핍박, 신분제도로 인해 미래를 잃어버린 민초들의 반봉건‧반외세 농민전쟁이 동학농민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죽창을 들었던 농민과 민초의 아픔과 고통에 비추어 오늘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요즘 시국에 대한 진단은 처한 입장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전환기적 변화를 겪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어지러운 이 시대의 의미를 진단해 보고 헤쳐나갈 지혜를 얻어보고자 동학농민전쟁의 현장 곳곳을 답사해 보았다며 최인규 국제대학교 특임교수가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현장을 돌아보고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주>
동학은 1860년에 비록 양반의 자식이었지만 재가녀의 자식이라 차별을 받아야만 했던 수운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오랜 수도 끝에 깨달음을 얻어 불우한 민중을 구제하겠다고 이름을 제우로 개명하면서 창시한 민간 사상이다. 최제우는 창시 4년 후, 대구에서 참형에 처해 졌지만 2대 교주 해월 최시형(1827~1898)이 최제우의 글을 모아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을 편찬하는 등 조직 확대를 꾀한 결과 1880년대에 동학의 교세는 경상도 지역을 벗어나 호남, 충청, 경기까지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영해동학운동
1871년 영해(오늘날 영덕)에서 교조신원운동(교조 최제우 복원 운동)을 명분으로 이필제가 민란을 일으켰다. 동해가 동학을 상징한다고 생각한 이필제는 영해에서 최시형을 만나 봉기를 제안했다.
3월 10일 밤 9시, 동학교조 최제우가 사형을 당한 지 7년째 되는 날에 이필제는 6백여 명의 도인과 함께 영해 관아를 점령했다. 이필제는 관아에 있던 공금을 풀어 마을 주민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틀 후 수많은 관군이 몰려오자 최시형은 경북의 최고봉인 일월산으로, 이필제는 단양으로 숨어들었지만 체포되어 12월에 처형되었다. 전봉준의 갑오농민혁명 보다 무려 23년이나 앞선 민중봉기였다.
고부민란
1893년 고부에는 군수 조병갑의 수탈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관아로 찾아가 탐학에 저항했지만 돌아온 건 곤장뿐. 그는 한 달 후 죽게 되니 전봉준은 고부관아를 점령하고 조병갑을 처형하며 전주성을 점령한 후 서울로 진격한다는 큰 계획을 세웠다.
1984년 1월 10일 밤, 전봉준은 현재 이평면사무소가 있는 말목장터에서 피를 토하는 연설을 한 후 1,000여 명을 이끌고 다음날 새벽 고부관아를 점령하였지만 조병갑은 도망가고 없었다. 전봉준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양곡을 나누어 주었다.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
안핵사 이용태는 난민 토벌을 명분 삼아 관련자들을 잡아들이고 재산을 뺏기 시작했다. 전봉준은 즉각 움직였다. 무장 대접주 손화중, 태인의 김개남 등을 설득하여 곧장 고부를 점령하고 백산으로 이동하자 주변 농민들이 죽창을 들고 몰려오기 시작했다. 농민들이 일어서면 흰옷만 보이고 앉으면 죽창만 보이기에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4,000명 이상이 모였다. 조정은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 군산으로 파견하였다. 동학군은 이들을 황토현으로 유인, 완벽하게 패배시켰다. 이것이 동학군이 처음으로 관군과 싸워 이긴 황토현 전투이다. 그 후 곧바로 전주성에 무혈입성하였다.
왕이 되고 싶었던 김개남
그는 전주성 점령 후 곧장 서울로 진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근왕주의가 머릿속에 남았던 전봉준은 청, 일 군대가 조선에 파병된 것을 알고 홍계훈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는다. 조선 땅에 외국군대 주둔의 위험성과 일본의 속셈을 알았기 때문이다. 김개남은 상심했다. 그는 비교적 부유한 양반 집안의 자식이었지만 반봉건주의 성향이 강했다. 왕이 되고 싶어도 했다. 해서 이름도 남쪽을 개벽시키겠다고 개남(開南)으로 개명한 듯하다. 그는 고려를 개국한 왕건이 백일 간 기도했고,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수도한 후 왕이 된 전북 임실의 상이암(上耳庵)에 한 달 이상 머물기도 하였다.
전봉준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김개남은 우금치전투 대신 청주를 공략했지만 패배 후 고향 정읍 매형 집에 숨어 있다가 임병찬의 고발로 포졸에게 잡힌 후 참수당했다.
참고로 전봉준은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순창군 쌍치면에서 체포되나 당당한 모습으로 재판에 응한 후 1895년 3월, 봉기를 일으킨 지 1년 2개월 만에 교수형에 처해 졌다. 사형선고를 내린 판사는 갑신정변 4대 주역 중 한 명인 개화주의자 서광범이다. 참 아이러니한 역사다.
김개남을 고발한 임병찬의 본관은 평택이다. 그는 김개남의 혁명 정신보다 잔학함에 시선을 둔 듯하다. 조정에서는 임병찬에게 포상으로 임실군수를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1906년, 임병찬은 최익현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일본군과 격전하다가 최익현과 함께 붙잡혀 대마도로 유배되었고 1907년 귀국하였다. 임병찬은 의인이며 진정한 애국자였다.
을사조약 이후 호남지역에서 일어난 저항운동 중심에는 최익현이 있었다. 그는 1906년 6월 4일 이곳 무성서원에서 74세의 고령임에도 구국의 기치를 든다. 무성서원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 중 하나이며 최치원을 배향했다.
일본의 내정간섭이 빌미가 된 2차 봉기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 청군이 물러가면 일본군도 물러가야 하는데 조선 침략의 야욕을 포기할 리 없는 일본군은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말한 이토 히로부미의 지침과 함께 정한론의 스케줄을 따랐다. 조선군이 일본군을 공격했다는 핑계로 아베 전 일본수상의 고조부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가 고종을 인질로 삼아 친일 내각을 세운다. 김홍집 내각의 갑오개혁 등 내정간섭의 기미가 보이자 동학군은 2차 봉기를 일으켰다.
해월 최시형은 손병희를 지휘관으로 삼아 북접을 이끌고 남접과 논산에서 만났다. 10~20만 명으로 추정되는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200여 일본군과 2,000여 조선군의 개틀링 포에 궤멸당했다. 최시형은 피신 생활을 하면서도 포교에 진력하다 1898년 3월 원주에서 체포된 후 6월 2일 서울에서 교수형에 처해 졌다. 당시 사형을 언도한 판사는 동학농민항쟁을 유발한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이었다. 망하자고 작정한 나라였다.
한편, 1894년 갑오혁명 당시 양반 신분으로 예천지역 접주로 활약했던 학초(鶴樵) 박학래가 집필한 학초전에는 당시 예천 일대의 농민혁명 활약상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자서전은 진압군의 시각이 아닌 농민군 입장으로 쓴 유일한 자료이다. 학초전을 통해 영남 북서부 일대의 동학 지도자 21명 중 양반 신분이 17명이었고 명가 출신도 많았음이 알려졌다. 학초 역시 양반 신분이었다. 양반과 평민 노비는 물론 지주, 굶주린 자까지 특정층의 혁명이 아닌 세도가에 저항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중혁명이었음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1894년 8월, 예천 인근에 반외세의 기치를 들고 동학도 4만여 명이 운집했다. 관군 위주로 편성된 집강소군 1,500명이 진로를 막아섰다. 학초 박학래는 고민했다. 동학군이나 그 상대방 측이나 다 불쌍한 조선 사람이기에 판단을 잠시 유보한 것이다. 그는 용단을 내려 동학군을 해산시켰다. 조선인끼리의 살상을 막기 위해서였다. 곧 벌어질 우금치전투 같은 학살을 고뇌에 찬 결단으로 막은 것이다. 진정으로 동학사상을 구현한 인본주의자였다.
학초는 최제우의 포교가사 용담유사와 같은 ‘경난가’라는 창작가사를 짓기도 하는데 이 가사에는 동학운동을 했던 전력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된 사정, 서울까지 유랑생활을 하면서도 동학농민 지도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갑오년 동학농민전쟁의 상황과 참상을 겪었던 양반 동학 농민지도자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는 유랑 도중 평택지역을 지나치면서 가사를 쓰기도 했다. 그 글에는 소사장터(소사 1동), 칠언주막(칠원마을/ 통복천 주막거리), 감쥬걸리(도일동 사거리/ 엄나무 상황목)등의 반가운 지명도 있다.
학초전은 그의 증손자 박종두(초등학교 교장 역임)이 교육자료로 해를 달고 정리하여 동학재단에서 발간한 소중한 학초의 자서전이다.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 조약
그리고 러일전쟁과 포츠머스 조약 등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그 조약에
대한제국은 한 글자도 넣지 못했다
이렇게 동학 농민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고부, 정읍, 순창 지역의 전봉준, 김개남, 최경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핍박받는 농민과 만나면서 세상을 바꾸기 시작한 동학. 동학농민혁명이 두려웠던 구한말의 지배층. 깨우치는 조선의 반봉건, 반외세의 정신이 싫었던 청나라와 일본. 그들은 서로의 탐욕을 위해 조선 땅에서 전쟁을 용인했다.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 조약 그리고 러일전쟁과 포츠머스 조약,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그 조약에 우리는 한 글자도 넣지 못했다.
아시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세계사적 항쟁인 동학혁명! 나라 곳간을 좀먹는 세도정치에 대항해 일으켰던 숭고한 항쟁,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추구했던 소중한 울부짖음이었지만 대한제국은 대처할 수 있는 그 어떤 역량도 지니지 못했다.
한국복지대학교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