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세 큰형, 안재봉 선생 고덕초등학교 세웠다
평택 출신 사회원로 특별 기획 취재
[평택시민신문] 평택 출신 사회 원로들을 만나 사라져 가는 평택 관련 생생한 역사를 듣기 위해 75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민족운동가 안재홍 선생의 조카딸인 안순희 전 숭덕초교 교장을 서울 정릉 자택에서 인터뷰했다. 이날 안재홍과 부친 안재봉 선생, 그리고 평택 고덕초등학교 설립과 관련한 귀중한 증언을 들었다.
작은 아버지 안재홍 선생의 권유로 동덕 여중고 졸업후 초등학교 교사로 고덕초 부임
안순희 교장은 민세의 큰형 안재봉 선생의 막내딸이다. 1935년 2월 평택서 태어나 서울로 유학 가서 해방후 동덕여중고를 다녔다. 당시 이 학교는 민세와도 친분이 있던 교육자 조동식 선생이 교장으로 있었다. 이후 초등학교 교사 자격을 얻고 고향 평택 고덕초등학교에 부임해 교사로 근무했고 숭덕초교 교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고덕초교에서 시아버지를 만나 그 인연으로 성결대 교수와 대한성결교 총회장을 역임한 기독교계 원로 남편 오희동 목사와 만났다.
“작은 아버지 안장관님은 제가 10대 시절 서울 돈암동 집에 놀러 가곤 했던 기억이 나요. 안장관님은 제 부친 안재봉님의 둘째 동생이지요. 근엄했지만 자상했던 분이지요. 저보고 나중에 중학교는 동덕학교에 가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나요. 나중에 학교에 들어갔는데 조동식 교장선생님이 절 부른 적이 있었지요. 가니까 네가 민세 선생 조카딸이나고 물으시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받았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동덕여중 마치고 동덕여고 졸업하면서 초등교사 자격도 얻게되었지요. 그리고 고향 평택 고덕초등학교에 가서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민세의 큰형 안재봉 선생, 고덕초등학교를 세워 인재육성에 힘써
개교 90주년을 둔 평택 고덕초등학교는 2016년 학교가 고덕신도시에 편입됨에 따라 아쉽게도 휴교에 들어갔다. 고덕초등학교는 2023년 고덕신도시에 현대식 새로운 시설로 재개교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고덕 어린이 교육의 산실인 고덕초교 설립자가 바로 안재봉 선생 이라는 귀한 사실을 알게됐다. 그동안 민세 선생 집안에서는 종덕초등학교 설립때 땅을 제공한 것으로만 알았는데 1930년대 초에 민세의 큰형 안재봉님의 후원으로 고덕초등학교 옛 교사를 구입하여 학교가 개교하는 틀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부친 안재봉님은 제가 태어나기 직전에 돌아가셨어요. 어머님으로부터 첫 근무지였던 고덕초등학교를 아버지께서 세우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학교에 가서 그 사실을 말씀드리고 제가 교사로 있는 동안에는 매년 조촐한 기념식도 했습니다. 그래도 누가 이 학교를 설립했는지는 기억하고 그 뜻을 이어가야지요. 둘째 안재홍, 셋째 안재학 두분이 일본 유학 다녀오고, 독립운동과 사회활동에 힘쓴 것은 고향을 지키며 후원한 큰형 안재봉님과 막내 안재직님의 도움도 컸다고 봐요. 이 형제분들의 헌신을 평택 사람들이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안재봉 선생의 초등학교 교사(校舍) 기증, 자료로도 확인 할 수 있어
안순희 교장의 귀한 이야기를 듣고 후에 관련 신문 자료를 확인해 봤다. 1930년 12월 13일자 조선일보에는 ‘무산교육을 위해 야학교사(夜學校舍)를 기부한 진위 안재봉씨의 특별한 뜻’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온다. 안재봉 선생은 1930년 11월 고덕에 새로운 학교 부지를 기부하고 고덕학교는 다음해인 1931년 7월 인가를 받아 11월 1일 개교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천원이면 서울에 큰 기와집을 살수 있는 큰 돈이었다고 한다.
진위군 고덕면 두릉리에서는 그곳 몇몇 청년들의 활약으로 무산 아동야학을 개시하고 수용할만 한 집이 없음으로 그 마을에다 넷으로 나눠 오십 여명의 아동을 가르치던 중 지난 11월경에 그 마을 유지 안재봉(安在鳳))씨는 그 아동을 수용할 만한 교사(校舍)가 없어 분산(分散)해서 떨어져 방황하는 상황을 불쌍히 여기고 싯가 200 여원의 회관을 사서 기증하였다는데 사람들은 안재봉씨의 특별한 뜻을 칭송한다고 한다(조선일보 1930. 12. 13 6면)
안재봉 선생, 고덕 마을 극빈자들을 위해 쌀과 현금도 지원
자료를 보면 안재봉 선생은 마을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도 발벗고 나섰다. 청소년교육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두릉리 마을 야학을 꾸준하게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 1930. 12. 13자) 1929년에는 설 쇠기 어려운 마을 극빈 가정에 쌀과 현금을 지원하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경기도 진위군 고덕면 두릉리에 거주하는 안재봉(安在鳳)씨는 그 동리(洞里)에 가뭄으로 인해 살기가 막막한 극빈자들을 동정하여 네 개 그 마을 극빈 가정에 백미 육십 석과 현금 육십원을 균일하게 나눠주어 설을 쇠게 하였으며 그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곡식을 빌려준 것까지도 전부 받지 않도록 하여 그 마을의 찬양함은 물론이요 인근 마을 사람들도 안씨의 후의를 감사한다더라(조선일보 1929. 3. 1자 4면)
민세의 중앙학교 제자 이병우의 중국 망명 독립자금도 안재봉 선생이 지원해
동생 민세의 기록에 의하면 안재봉 선생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맞아서는 민세와 함께 마을과 주변 친척들을 찾아다니며 국권회복에 노력하자고 했을만큼 민족의식이 강했다. 국어학자 이희승씨의 증언에 의하면 안재봉 선생은 1919년 8월 평택 게루지를 찾아온 자신을 통해 민세의 중앙학교 시절 제자 이병우의 중국 망명 자금으로 거금 150원을 지원했다.
안재봉 선생과 막내 안재직 선생은 평택 고향의 재산을 관리하며 민세의 항일운동을 꾸준히 도왔다. 민세의 9번 7년 3개월 옥고 생활도 뜻을 같이하는 든든한 형제들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안재봉 선생의 장남이자 안순희씨 오빠인 안우용씨는 민세의 소개로 민세와 친분이 있던 시인 수주 변영로 선생의 형인 변영태 초대 외무장관의 따님과 결혼했으나 6.25때 납북됐다고 한다.
고덕 초교 재개교때 동문과 지역사회가 함께 설립자를 기억하는 행사 열기를
형을 닮은 민세 선생도 민족운동의 과정에서 교육 구국을 실천했다. 1949년 서울 돈암동에 중앙농림대학의 초대학장으로 취임해 신생 대한민국의 농업인재 육성에 힘쓰기도 했다. 민세 집안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계속 이어져 조카딸 안순희씨가 고덕초교에서, 민세 둘째 며느리인 박갑인씨가 종덕초등학교 교사로 어린이를 가르치며 선대의 뜻을 따랐다.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점점 아쉬운 세상이다. 대한민국의 국가교육 이념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제시한 사람이 안재홍 선생이다.
민세가는 고향 평택의 인재육성을 위해서도 소중한 활동을 했다. 고덕초등학교를 설립하고, 종덕초등학교의 부지를 희사한 안재봉 선생등 민세가의 헌신이 평택지역에 더 많이 알려지고 그 정신이 계승되면 좋겠다. 품격있는 평택은 그 역사를 아는 것에서부터 가능할 것이다. 2023년 고덕초교 재개교때는 동문, 학부모, 지역사회가 힘을 모아 학교 설립자의 뜻을 기억하는 공간 명명 사업이라도 하면 좋을 것이다. 고덕 신도시 새학교 이름도 고덕 1· 2· 3 초교라는 기계적 명명이 아니라 민세초등학교라는 학교명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황우갑 본지 시민 전문기자·민세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