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대권주자군(群)의 상반기 일지(日誌)
안 원 복 (중부일보 논설위원)
2001-05-28 평택시민신문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민심을 얻어야 하겠지만 이 지역에 가서는 이렇게 민심을 긁고 또 저 지역에 가서는 또 다른 말로 감정을 자극하니 문제인 것이다. 당당하게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는 대권주자의 의젓한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이미 지역감정을 들먹이는 기술은 3김보다 더 능숙한 것 같다는 얘기도 들린다.
지난 총선 때 시민단체로부터 "퇴출1호"선고를 받았던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의 움직임을 계기로 정치권이 돌연 부산해졌다. 김대중 대통령과 결별한 듯 보였던 그는 지난해말 공조 복원을 선언한데 이어 교섭단체 구성을 놓고 자신을 구박했던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지고도 이기는 것 좀 배우라고 해"라는 자신의 고함에 "지고도 이기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라고 화답하자 이 총재를 찾아가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을 사실상 출당시켰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예전을 찾아 "JP는 할 일이 남았다"는 그의 응원에 답례하면서 느닷없이 공조 파트너인 김대통령의 염원인 보안법개폐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반면 그를 유신잔당으로 몰아 붙였던 학생운동권 출신 김근태 의원 등은 그와 저녁을 함께 하면서 그를 "학생운동 선배"라며 반겼다. 또 며칠 뒤면 그를 "지는 해"라고 비아냥거렸던 이인제씨가 오랜 앙망(仰望) 끝에 그를 만난다고 한다. "내일 일을 말하면 귀신이 웃는다"는 얘기가 실감난다.
대권 경쟁을 눈앞에 두고 모두들 이리 뛰고 저리 뭉치고들 있지만 분명히 늦어도 1년 안에 이들 중 몇 명은 서로를 욕하고 삿대질을 하고 다닐 것이다. 먹이나 침입자 앞에서 수시로 위장색을 바꾸는 카멜레온도 우리 정치판을 보면 두말없이 "졌다"고 꽁무니를 뺄 것이 틀림없다. 이런 식으로 가면 내년 대선에서도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뭉쳐 국민들의 지지를 구하는 모습을 찾긴 애시당초 글렀다고 보면 된다.
지난 3월말 경 경남 산청에서는 성철(性徹) 스님 생가 복원식과 아울러 겁외사(劫外寺, 시간과 공간 밖의 절) 창건 법회가 진눈깨비 날리는 궂은 날씨 속에 열렸다.
그러나 이날 행사가 더욱 눈길을 끈 것은 아마도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김중권 민주당 대표가 약속이나 한 듯 나란히 부부동반으로 참석한 탓이리라. 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회창 총재는 카톨릭이고 김중권 대표는 교회장로다. 물론 독실한 카톨릭교도나 교회 장로가 법회에 참석하거나 합장해서는 곤란하다는 식으로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겁외사를 간 까닭이 이미 시작된 대선행보 차원에서 "불심(佛心)"을 잡기 위한 전초전이라는 사실쯤은 삼척동자도 알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불심"이 토끼잡고 닭잡듯이 잡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대선행보에 나선 사람은 비단 이 총재와 김대표만이 아니다.
민주당의 이인제, 김근태, 한화갑 최고위원과 노무현 상임고문 등 여권 내의 자천타천 대권후보들은 일제히 "대선 앞으로"를 외치면서 한편으론 김심(金心)을 살피고, 다른 한편으론 민심(民心)을 저울질 해가며 저마다 대선고지를 향한 때이른 각개전투에 뛰어들었다.
이미 여권 내 최고위원들을 중심으로 한 대권행보가 얼마나 꿈틀거렸으면 지난 달 중순 청와대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대통령이 직접 나서 "개인적 대권 행보로만 비춰지지 않게 하고 정부업적을 적극 홍보하라"는 대선행보의 가이드라인까지 내렸겠는가.
대권을 거머쥐기 위해서는 최소한 불심(佛心)ㆍ김심(金心)ㆍ민심(民心)의 3심을 잡아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이를 위해 불사에 공을 들이고, 김심을 요모조모 살피며, 이미지 선점(先占)을 위한 대규모 후원회를 열고, 연구소와 재단설립을 빙자한 대선 외곽조직을 출범시키며 사실상 지역세 불리기인 각종 명목의 지방나들이 대선행보가 본격화하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건강보험 적자도, 천장부지로 뛰고 있는 전ㆍ월세금도 이젠 통계수치가 아니라 체감수치로 곧장 확인되며 실업자 급증도, 대북관계의 끝간 데 모를 혼선과 대미관계의 어처구니없는 난조도, 무너져버린 참담한 교육도 그들에게는 더 이상 그렇게 절실하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여기"의 시간과 공간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대권의 겁외사"를 향해 길을 떠났기 때문이다. 합장을 하며 불심에 호소할 수 있고 이미지 경쟁을 하며 김심에 눈길 맞출 수도 있다. 그러나 자권타권의 대권주자들이 "지금여기"에서 "악"소리조차 못 내고 삶에 지쳐 허탈해 있는 국민들을 외면한 채 "대권의 겁외사"로 달려간다면 결국 민심은 돌아선다.
야당쪽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 수뇌부는 경상도 사람들이 몰표를 주겠다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영남지역정서만 싸고돈다. 한나라당에서 떨어져 나온 TK출신의 모인사는 느닷없이 영남이 동의할 수 있는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연합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지역정서에 기대해 꺼져 가는 자신의 정치적 불씨를 살리려는 그의 모습이 안타까워 보인다. 그들에게 더 이상 민심은 둥지를 틀지 않을 것이다. 여권이든 야권이든 대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생각해야 할 대목이다. 지역감정에 편승하려는 이른바 대권주자들과 그 주변 사람들의 요즈음 모습이 정말 가관(可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