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고덕 「樗山(저산)」안재홍선생 생가보전의 시급성

2016-06-01     평택시민신문

김인식

중앙대 교양학부대학

교수문학박사

얼마 전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 선생이 태어나신 집〔生家〕의 일부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재 안재홍 선생의 ‘생가’로 불리는 집은 1913년 건립되었다는데, 선생이 혼인한 뒤 분가하여 살던 곳이므로 사실상의 생가는 아니다. 선생은 가혹한 일제 지배 아래에서 일선의 활동을 비롯해 정치운동이 모두 묶이자, 낙향하여 우리 역사 연구에 몰두하며 정진하시었다. 현 생가의 사랑채는 선생께서 우리 고대사 연구를 비롯하여,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에 대한 글을 생산한 산실(産室)이었으며, 한국통사(韓國通史)를 완성하려던 포부를 펼친 곳으로, 우리 민족사를 보전하려던 선생의 체취가 서려 있어 소중하다.

이러한 자취에 말 그대로의 ‘생가’를 찾아내었으니, 안재홍 선생의 삶의 흔적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느낌이다. 선생이 평택 출신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인물임은 이제 새삼 말할 필요가 없으며, 아호(雅號)가 민세(民世)임도 상식인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선생이 일본에 유학하던 21세(1911년)에 청년의 가슴속에 품은 ‘장대한 기개와 포부’를 담아 ‘민중의 세상’이란 의미로 아호를 지었으며, 이후 ‘민족에서 세계로’라는 뜻을 덧붙여 평생 실천하셨다.
안재홍 선생은 필명으로 ‘안재홍’이라는 본명과 ‘민세’라는 아호를 가장 많이 사용하였는데, 간혹 대종교 계통의 글에는 ‘규당’(逵堂)․‘응암’(應庵) 등을 쓰기도 하였다. 또 저산(樗山)이란 필명도 적게나마 나타나는데, 이제 이 필명의 의미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저산’을 아호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민세’가 아호이고, ‘저산’은 필명일 뿐이다〕.

안재홍 선생의 저작물이 워낙 방대하여 일일이 확인하지 못한 채 단언하기 어렵지만,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저산’이란 필명은 ‘다산선생특집’(茶山先生特輯)으로 발간한 󰡔신조선󰡕(新朝鮮) 통권12호(1935년 8월 15일 발행)의 「권두언」(卷頭言)에 처음 나타난다. 선생은 이 특집호에 다시 ‘저산후학(樗山後學)’이란 필명으로 「정다산선생연보」(丁茶山先生年譜)를 게재하였다. 1937년 2월에는 저우산인(樗牛山人)이란 필명으로 「현대조선(現代朝鮮)과 율곡선생(栗谷先生)의 지위」란 글을 발표하였다. 8․15해방 이후에도 1949년 9월 신생활운동을 전개하면서 ‘저산장부’(樗山丈夫)라는 필명으로 신문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최근 새롭게 발견된 민세 선생의 생가는, ‘현 민세생가’에서 50여m 떨어진 곳에 있으며, 행랑채․우물과 일부 부속건물이 남아 있다. 새롭게 확인된 생가 터에 100년 넘은 가죽나무가 남아 있음은 더욱 놀랍고 반갑다.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곳은 가죽나무가 많이 자라는 곳이며, 실제 두릉리 마을 주변 곳곳에서는 가죽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평택시민신문 815호(2016년 5월 25일)의 문영일 기자의 글〕. 그렇다면 안재홍 선생이 가죽나무 ‘저’(樗)를 사용하여 ‘저산’으로 필명을 삼았음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 마을에 가죽나무가 많이 자라나 마치 산을 이루는 듯한 생태와 관계있음이 분명하다. 선생은 필명에 자신의 고향 마을의 자연 생태를 담는 애정을 보였다. 
그래도 두 가지 문제가 남는다. 한문에 해박하고 능숙한 안재홍 선생이, 한자문화권에서 무용지물의 상징으로 전래되는 가죽나무를 필명으로 사용한 이유이다. 또 하나는 앞서 ‘저산’이라는 필명이 나타난 시기를 옳게 추정했다면, 안재홍 선생이 정약용 선생을 다룬 글에서 이 필명을 처음 사용하였을까 하는 점이다.
첫째 문제와 관련하여 󰡔장자󰡕(莊子) 「逍遙遊」 편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혜자(惠子)가 장자(莊子)에게 말했다. 「내게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걸 가죽나무라고 하더군요. 줄기는 울퉁불퉁하여 먹줄을 칠 수가 없고, 가지는 비비꼬여서 자(尺)를 댈 수가 없소. 길에 서 있지만 목수가 거들떠보지도 않소. 그런데 선생의 말은 〔이 나무와 같아〕 크기만 했지 쓸모가 없어 모두들 외면해 버립디다.」 〔그러자〕 장자는 말했다. 「… 지금 선생에게 큰 나무가 있는데 쓸모가 없어 걱정인 듯하오만, 어째서 무하유(無何有)의 드넓은 들판에 심고 그 곁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한가로이 쉬면서, 그 그늘에 유유히 누워 자 보지는 못하오. 도끼에 찍히는 일도 누가 해를 끼칠 일도 없을 게요. 〔그런데〕 쓸모가 없다고 해서 어째서 괴로워한단 말이오.”(안동림 역주, 󰡔莊子󰡕, 43~44쪽)

위의 <장자>의 글을 참조한다면, 가죽나무는 세상에서 순간의 실용(實用)으로 쓰이기보다는, 대자연에서 유유자적하는 자유의 세계를 상징하는지도 모르겠다. 안재홍 선생은 장자에 나오는 ‘가죽나무’를 상정하였을까. 물론 현재로서는 추정하는 수준일 뿐이다.

이보다 더 막연한 추론이지만, ‘저산’이란 필명이 혹 정약용 선생과 관련이 있다면, 이 또한 해명해보고 싶은 숙제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쓰기 위해 몇 군데 찾아본 결과, 정약용 선생은 가죽나무를 “냄새나는 가죽나무에서 특이한 향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서” 등 가죽나무에 동양 전래의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는 통례를 보였다. 정약용은 선생은 무려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고, 안재홍 선생도 방대한 저작물을 남겼으므로, 정약용과 ‘저산’의 관련성 여부는 앞으로 세심하게 탐독하며 추적해 보아야할 과제이다. 분명한 점은 안재홍 선생에게 정약용 선생은 인생의 롤모델이었다는 사실이다. 안재홍 선생은 정약용 선생을 가리켜 ‘조선 학술사상 태양과 같은 존재’로 칭송했으며, 1934년 ‘다산서거99주년’을 맞아 ‘조선학’을 내세우면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교열․간행하기 시작하였다. 정약용이란 존재 자체와 그의 삶은, 후학(後學) 안재홍 선생에게는 식민지의 혹한기를 이겨내는 힘이 되었다.

현재 생가로 불리는 주변은 민세역사공원이 조성될 공간으로 알고 있다. 민세기념사업회에 따르면,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안재홍 선생의 고택(현재 생가로 불리는 곳)에서 불과 50m 떨어진 실제 생가는 안재홍 선생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로, 선생의 아버지 안윤섭씨와 큰형 안재봉씨 집이기도 하며, 작은 아버지 안태섭씨 집과 연결되어 있다. 큰형 안재봉씨는 두 동생 안재홍․안재학의 일본과 독일유학을 지원하고 인근 종덕초등학교를 건축할 때 땅을 제공하기도 했다(이 글을 쓰기 위해, 민세기념사업회에서 필자에게 제공한 자료 참조)

민세기념사업회는 민세역사공원의 의미를 더하기 위해서라도, 이번에 확인된 생가의 행랑채와 숙부 안태섭 씨의 가옥, 가죽나무․우물 등에 대한 조사와 등록문화재 지정이 검토될 필요성을 제기하였는데 올바른 방향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또 사업회는 현재 평택시 관계부서와 함께 LH공사 측의 공원조성 계획 변경에 대한 의견을 논의 중이며, 앞으로 시민사회와 지자체가 뜻을 모아 생가와 부속건물을 보존할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는데, 〔󰡔평택시민신문󰡕815호(2016년 5월 25일)의 문영일 기자의 글〕 마땅히 추진할 사업이라는 데에 전폭 동의한다.

민세기념사업회 사무국에서는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의견도 전하였다. “자세한 것은 전문가 현지 조사가 필요하지만 이곳에는 현재 일부 행랑채와 민세 고택보다 앞서 건축물로 추정되는 한옥 건축, ‘저산’을 상징하는 가죽나무 고목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는 만큼, 향후 지역사회가 힘을 모아 한국토지공사와 경기도 등에 요청해서 건축문화재와 보호수 지정 등을 통해 안재홍 생가의 장소정체성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더구나 이곳은 민세 안재홍 선생 관련 역사유적에 ‘민세 정신’을 반영한 고덕국제신도시와 민세역사공원이 조성되는 만큼 그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수 있다.”

민세 정신을 선양하려는 기념사업회의 노력에 고마움을 표하며,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적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근거 자료를 제시하는 의미에서 이 글을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