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린 잎으로부터
김 성 경<송탄여중 교사>
2003-04-30 평택시민신문
“난 이맘때 돋아나는 나뭇잎 색이 제일 좋더라.” 얼마 전 함께 길을 걷던 친구가 뜬 금 없이 가로수를 보며 던진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걷던 난 참 오랜만에 가로수를 유심히 보았다.
정말로 여리디 여린 연초록 잎들이 가지 곳곳에 수줍게 움트고 있었다. 색이 참 예뻤다. 맞장구를 치려는데, “저 색에는 생명이 담겨있고, 가능성이 숨어 있거든.” 마치 선문답 같은 말이 이어졌다. 버스터미널까지 가면서 그리 싫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애들 잘 가르쳐.”라는 말을 던진 친구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버스에 올랐고 힘겨운 손짓을 하며 터미널을 빠져나갔다.
온 길을 되짚어 집으로 향했다. 친구의 좋지 못한 건강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망연히 걷다가 친구의 말이 떠올라 가로수 여린 잎에 눈길을 주는 순간, 친구가 멀리서 이곳까지 나를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선생이 꿈이었지만 좋지 않은 건강과 가정 형편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친구를 떠올리니 갑자기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날 이후 내게 ‘생명’과 ‘가능성’은 커다란 화두였다.
언어의 유희로 생명을 치장하지 않더라도 생명만큼 소중한 것이 있겠는가. 또한 생명이 붙어있는 한 변화를 막을 수 없다면, 가능성 또한 늘 우리와 함께 하고있지 않던가.
그 가능성이 때로는 뛸 듯이 기쁜 일로, 때로는 인정하기 싫을 만큼의 아픔으로 저며온다 해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난 매일매일 많은 어린 생명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가능성을 비교하고 재단하고 있지 않던가.
성적표를 받아들고 당황하는 아이들에게 다음을 기약하라는 위안과 기대의 말보다 ‘뿌린 만큼 거둔다.’는 악담에 가까운 염려를 했다.
아이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해결해 보도록 지켜보는 것이 답답하여 명 판관을 자처하며 불복할 수밖에 없는 판결을 내려주었다. 말썽이라도 부리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아이를 반성시키고, 부모님과 함께 걱정의 말을 나누며 내 임무를 다 하였다.
아이들의 잠시 후 모습조차 예상하지 않았다. “애들 잘 가르쳐.”라는 친구의 말은 나를 둘러싼 이 현실을 모두 설명하고도 남았다.
가능성은 앞으로의 일에 수많은 갈래를 친다. 그럼에도 언제나 현재에 머물러 판단한다. 대학 입시를 위해 행복을 미뤄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꿈을 갖는 것은 괜한 잠을 자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가능성을 이야기할 때 잘못될 것을 염두에 두기보다 판도라 상자 속의 희망을 생각한다. 그렇듯 아이들을 희망을 담은 가능성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여린 잎이 벌레로 인해 구멍난 잎이 될지 모른다는 노파심이, 행여 제각각의 빛깔과 모양으로 다채롭게 어우러질 자연의 아름다움을 해치지는 않을까.
친구를 떠나보낸 날 저녁, 잔잔히 비가 내렸다. 비 개인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본 가로수의 여린 잎들은 한껏 더 빛을 발하고 있었다.
<교단에서 온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