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논단 - 세월, 20년, 송탄 사우회(寫友會)

이 수 연<경기도 사진협회장>

2003-04-23     평택시민신문
▲ 이수연<경기도 사진협회장>
평택예술사에 한 획 그은 송탄 사우회… 창립 20주년을 의미있게 기억하고 싶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백 번 옳은 말이다. 이 말은 최근 어느 카메라 회사가 디지털 카메라를 선전하면서 내건 슬로건이다.

나이가 들면서 가물가물해 가는 기억보다 한 줄이라도 기록해 놓은 글이 더 정확한 법이다.

얼마 전에 20년이나 된 업무수첩 한 권을 찾았다. 어지간해서는 자료를 잘 버리지 않는 습관이 가져온 덕이다. 세월이 20년이나 흐른 뒤에 그 수첩의 가치를 발견하고서는 기록이 가지는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수첩이 아니더라도 필자의 기억에 만 20년 전인 1983년은 평택 사진의 오늘을 있게 한 해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거기에 같이 관여한 다른 이는 그보다 이르다고 자주 말하던 터여서 답답하던 터라 반가운 발견이었던 셈이다.

1983년 4월. 그때 송탄사우회가 발기모임을 가졌고 그를 기점으로 1988년 6월에는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송탄지부를 발족한다. 이는 송탄 최초의 공인 예술단체의 등장을 의미하는 데 여기에 힘입어 국악협회를 창립하고 이어서 미술협회를 창립함으로써 1990년 7월에는 송탄예총(한국예술문화단체 총 연합회 송탄지부) 창립을 이끌어 송탄예술의 체계적 발전을 가능케 한 밑바탕이 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예술활동의 중심이 문화원(송탄문화원)에서 격에 맞게 예총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된 것을 의미한다. 이후 음악협회와 문인협회의 창립으로 이어지다가 1995년 송탄평택 도농(都農) 통합으로 그 해 8월에 통합 평택예총이 탄생한다.

그렇게 볼 때 송탄사우회의 등장은 평택예술사에서 결코 작지 않은 사건이 되는 것이다.

송탄사우회는 아주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다. 1982년 가을, 송탄보다 몇 년 빠른 연륜을 지녔던 평택의 사진 동아리 ‘프리즘 클럽’ 회원전에 필자가 초대작품으로 낸 사진을, 우연히 송탄의 원로 서양화가 김정식 선생이 보고 만나자는 기별을 해왔고, 그렇게 나간 자리에 송탄 성모의원 최규웅 원장이 함께 하여 송탄지역에 사진예술을 도입하자는 데 의기투합하게 된 것이다.

그때가 83년 3월이었으니 불과 1개월 여 만에 발기 총회를 거쳐 첫 촬영회를 가졌고 당시 인구가 10만이 채 안되던 송탄에서 회원 모집한다는 신문 전단을 보고 무려 90명에 가까운 회원이 모였으니 대단한 호응을 받은 것이다.

당시의 면면을 살펴보면 초창기에 회원으로 입회한 사진인들이 평택예술계에서 중심역할을 했거나 하고있는 분들이다.

창립회원이었던 최규웅 원장은 송탄예총 초대회장을 지냈고 오세문 2대 사협지부장 역시 송탄예총회장을 그리고 김정식 선생은 송탄문화원 부원장을, 사진작가협회(사협) 송탄지부 정영준 초대지부장을 비롯하여, 전 현직인 손우홍, 김성용, 최왕호 지부장 등 아직도 왕성한 예술활동을 하고 있는 이들 모두 초창기 회원이다.

필자 역시 사협지부장을 거쳐 평택예총회장과 경기도 사진협회장을 역임하고 있으니 초창기 회원의 자긍심을 이어가고 있는 것일까?

대를 이은 초창기 회원의 임직(任職)이어서인지 전국적으로 만연한 각종 단체들의 불신, 분열, 대립은 찾아볼 수 없고 아직 평택사협은 모범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초창기에 낙후한 기지촌 군사문화의 잔재를 불식시켜보자던 그 순수한 초심(初心)이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으니 평택예술사에서 한 획을 긋는 송탄사우회 탄생 20년을 맞아, 평택사협은 물론 송탄사우회도 그 의미의 중요성에 비해 관심이 약한 것 같다는 사실이다.

굳이 거창한 사업이나 행사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창립의 가치를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것도 앞으로 또 다른 20년을 위해서라도 필요할 때가 아닐까 한다.

<평택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