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지역정체성 찾기와 내고장 문화판촉

황우갑 <평택시민아카데미 회장>

2003-03-19     평택시민신문
▲ 황우갑 <평택시민아카데미 회장>
잊혀진 경기·충청지역 판소리 중고제와 국창 이동백 선생

유적정리 학술행사 소리비 세우기 통해 그 업적 알려야

우리 평택에는 과거의 역사속에서 후대의 교훈이 될만한 한국음악의 전통을 잇는 인물들과, 지역음악문화의 맥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8세기 판소리의 고제를 대표하는 국창 모흥갑이 바로 우리 평택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경기·충청지역의 판소리 중고제 국창 이동백 선생이 말년을 보낸 곳이 송탄동 칠원리이다. 또한 서해안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경기도당굿”의 맥을 이어 한국음악의 현대화에 기여한 지영회 선생의 고향이 평택 포승이며, “아랫다리” 영호남 농악에 대별되며 역동성인 가락으로 이름 높은 “웃다리” 평택농악의 전통이 지역소리로 살아 숨쉬고 있다.

문화관광부는 2003년 3월의 문화인물로 판소리 근대 5명창으로 이름을 날린 이동백 선생을 지정하고 다양한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 국립국악원에서는 “이동백 기념특별전시회”가 3월 한달간 개최되고 있으며, 국립민속국악원 주최로 이동백이 애창한 판소리 “심청가”를 창극화한 “효녀 심청”의 공연이 3월 25일부터 나흘간 있을 예정이다.

국창 이동백은 1866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26세에 득음을 하고 고종 황제의 어전에서 판소리를 하여 소리꾼 최고의 영예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하사받은 당대 최고의 소리꾼이었다. 후리후리한 키에 건장한 몸집, 흠이나 거친데가 없이 미끈하게 빠진 이목구비, 늠름하면서도 대가 바르며 온화하고 인자한 성품, 선천적으로 타고난 맑고 아름다운 성음으로 사람의 넋을 잃게 하며 일제 강점기 힌국 소리의 맥을 지킨 한국 판소리사의 거목이다.

일제하에서 일류소리꾼 대접을 받은 이는 동편제 명창 송만갑과 중고제 명창 이동백 둘 뿐이었다고 한다. 국창 박동진 선생의 스승이기도한 이동백 선생의 소리는 제자 강장원의 요절과 공기남의 월북으로 지금은 전승이 끊어진 상태이다. 선생의 중고제 소리는 판소리의 원형인 고제 소리의 맥을 이으면서 김성옥으로부터 시작된 “중고제” 소리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불과 50년전만 해도 최고의 소리로 평가받던 판소리 유파였다. 영화 “서편제”로 유명한 서편소리도 일제시대와 해방시기까지는 “중고제”의 인기에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궁핍한 일제 강점기에 “조선성악연구회”를 통해 한국음악의 법도를 세우며 우리 소리 보존에 힘쓴 이동백 선생이 은퇴후 타계할 때까지 10여년간 머무른 곳이 바로 평택이다. 선생은 1939년 조선일보 주최 은퇴공연 이후 부인의 고향인 평택시 송탄동 칠원2리(새말)에 정착하고 1950년 6월 6일 타계할 때까지 소리 인생의 마지막을 우리 고장에서 보냈다. 선생은 돌아가실때까지 북을 매고 뒷산에 올라 소리를 부르며 완성을 향한 끝없는 노력을 했다고 한다.

1999년 가을 필자가 답사하여 확인한 바에 의하면 선생이 사시던 생가는 그 때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으나 그 해 겨울 유류창고가 들어와서 사라졌다. 선생의 무덤도 10여년 전까지 원곡 부근 산야에 남아 있었으나 화장을 하여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진 상태다. 늦게나마 선생이 이달의 문화인물로 지정된 것을 반갑게 생각하며 앞으로 평택에서도 선생과 관련된 유적을 정리하고, 학술행사를 통해 중고제의 판소리사적 가치를 재음미하며, 선생의 소리비를 세워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알리는 작업들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지방분권과 지방자치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제도적 노력과 함께 지역정체성을 찾고 관련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또한 단순한 문화 유산의 보존과 관리에 머무는 현재의 지역문화유산 정책에서 탈피하여 내 고장의 문화를 알리고 관광정책에 반영하는 적극적인 내 고장 문화판촉 전략이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특별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