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마패에 관심 갖나

박물관이 있는 도시, 평택을 꿈꾸며- ②

2015-03-12     고기복 기자
▲ 황자호 4마패 뒷면 (제작:상서원, 제작년도:천계 4년 3월(인조 2년 1624), 크기:12x10cm)

전국 각지를 방문해 가정집에 숨어 있던 보물을 감정해주는 KBS 장수 프로그램 ‘진품명품’ 단골 의뢰품목 중 으뜸은 마패입니다. 하지만 19년이 지난 지금까지 900여점 중 진품이 단 한 건이었을 정도로 마패는 위조품이 많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무렵 “마패를 집안에 걸어두면 귀신이 접근 못 한다”는 풍문이 돌자 민간에서 부적처럼 사용하면서 유기공장에서 다량 제조됐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시중에 위패가 많이 유통되고 있다고 합니다. 마패하면 쉽게 놋쇠로 된 둥근 패를 연상하는데, 조선초기에는 금속이 아닌 나무로 된 마패를 사용하였습니다. 나무마패는 파손이 심해 1434년(세종 16) 2월에 철로 제조하기 시작합니다.

‘암행어사의 상징’ 마패는 고려~조선시대 암행어사나 관원이 지방에 갈 때 마패에 새겨진 말 마릿수(1~5마리)만큼 역마(驛馬)를 징발할 수 있었던 증표였습니다. 마패는 역참에서 말을 빌릴 때 제시했던 증빙서이기도 하면서 통행증 혹은 신분을 나타내는 역할을 대신하던 물품이었던 것입니다. 관원들은 임무를 마친 후엔 마패를 조정에 반납했습니다. 행여 마패를 잃어버리거나, 위조하면 그 문제가 조종의 중심 기관인 의정부에서 논의되고 죄를 문책할 정도로 큰 사안이 되곤 하였습니다. 실례로 승정원일기 고종3년(1866년) 기록에는 마패를 위조한 자를 문책하여 목을 잘라 걸어 놓는 효수형에 처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반면, 일성록 정조10년(1786년)에는 마패를 주워 헌납한 사람에게 큰 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런 까닭에 마패 진품이 민간에 남아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왕이 낙향한 신하를 도성으로 불러오기 위하여 마패를 하사하기도 하였는데, 그런 마패가 민간에 전해졌을 가능성은 있다고 합니다.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한 진품 마패는 6점. 창경궁, 창덕궁, 장서각 등에서 발견된 것으로 말 1~2마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영조시대에 암행어사는 보통 3마패를 가지고 다녔고, 열 마리가 그려진 10마패는 왕과 왕실에서, 영의정은 7매패를 사용했습니다. 유명한 박문수 암행어사는 암행감찰 활동 및 시급한 장계를 올릴 때 3마패를 사용했습니다. 탐관오리들을 한 방에 처단할 정도의 위력이 있었던 삼마패보다 더한 4마패나 그 이상은 어느 정도 권위를 자랑했을지 알만합니다. 그런데 고서화 수집가 신찬호(76, 신장2동) 선생은 진품 4마패를 갖고 있습니다.

해외반출 막으려 큰 돈 들여
구입한 진품 4마패
왕의 두터운 신임 아래 민심
살피던 암행어사 숨결 느껴져

어떤 이는 고서화 이야기하면서 뜬금없는 마패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패는 왕명을 받은 신하임을 증명하는 패로서 암행어사의 문서에 직인으로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마패 인장은 고서화에 드물지 않게 등장합니다.
KBS 진품명품 프로그램 사례에서 보듯, 시중의 가짜 마패는 말 4~5마리짜리가 가장 많다고 합니다. 선생 역시 4마패를 갖고 있다 보니, 주위에서 ‘그거 위패 아니냐’는 의심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그런 의심을 털어버리기 위해 선생은 마패를 입수한 이후, 1990년에 (사)한국고미술협회로부터 감정을 받아 진품임을 확인했습니다. 고서화 수집가인 선생이 수집한 물품들은 고서화뿐 아니라,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사 주요 인물들의 휘호 등 500여 수집품은 박물관에 있어야 할 희귀물품들입니다. 그 중 사비를 들여 감정 확인까지 할 정도로 가장 애지중지하는 4마패는 어떻게 선생의 수중에 들어왔을까요?

“1990년대 외국인 문관이란 사람이 지방정보지 한 장을 들고 와서 자문을 요청한 적이 있어요. 지방지에는 ‘4마패, 2천만원에 판매’한다고 나와 있었는데 그게 어느 정도 귀중품이며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느냐고 묻더군. 당시 정보지 내용만으로는 4마패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만일 진품이면 상당한 가치를 지날 거라고 답하고 나서부터 고민에 빠졌어. 그 문관이 2천만원에 사겠다는 거야. 여차 하면 귀중한 문화재가 외국으로 빠져나가겠다 싶더라고. 그 문관이 구매하기 전에 먼저 사야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정했지만, 당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어요. 당시 2천만원이면 이충동 현대아파트 32평이 2500만원 할 때니까 큰돈이었지. 그래도 무턱대고 판매자를 찾아가서 물건을 확인했어요.

판매자 이야기는 이래요. 대대로 가보로 내려오는 물건인데, 5대조 할아버지께서 훈장 선생님이셨는데, 암행어사를 배출했던 양반집에서 자제를 과거 급제할 때까지 가르친다는 조건으로 받은 선물이라는 거야. 마패는 임무가 끝나면 조정에 반납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암행어사가 반납하지 않았던 것인지, 임금께서 다시 하사하신 것인지 모르지만, 서당 훈장이셨던 5대조께서 그 가치를 알아보시고 마패를 받고 안방 천장에 숨기셨다고 해. 그렇게 해서 집안 장손에서 장손으로 이어진 거지. 그런데 장손이던 판매자 형님이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마패를 동생에게 넘겼대. 이 양반이 무역업을 하다가 보증을 잘못 서서 불가분하게 판매하게 되었다는 거야. 사연을 듣고 딱 보니까 뭔가 감히 잡히더라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스스로 대견하다는 선생은 마패 구매 후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합니다. 1996년 경기도 박물관 설립 때 납품 비리 문제로 연일 TV 9시 뉴스가 시끄러웠을 때, 당시 경기도 의원이던 김학용 국회의원(새누리, 안성)이 선생을 찾아와서 마패 진위를 확실히 해 줄 것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 결과 경기도는 행정사무감사를 통하여 박물관 보관 마패는 위패인 반면,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마패는 진품인 것을 확인해 줬습니다. 선생이 애지중지하며 자랑하는 4마패는 상하 길이 12cm, 너비 10cm, 700g으로 천계 4년 3월에 상서원에서 제작되었다고 마패 뒷면에 기록돼 있습니다. 천계 4년이면 갑자년으로, 인조 2년입니다. 인조반정 후 반정을 주도해 정권을 장악한 공신들은 반대 세력에 대한 경계가 심해 반역음모 혐의로 잡히는 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인조 2년, 인조반정 2등 공신으로 평안병사 겸 부원수였던 이괄은 외아들 전이 모반죄로 조사를 받게 되자, 본인도 온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일반적으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고 알려진 이괄의 난은 집권층의 의구심에 의한 우발적 반란으로, 당시 조정이 얼마나 어수선했는지를 말해 줍니다.
어찌됐든 이괄은 1624년 1월 22일 휘하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한양으로 향했고, 2월 11일 한양 경복궁 옛터에 주둔합니다. 하지만 2월 15일 부하장수들의 배반으로 목이 잘리는 운명을 맞았습니다. 4마패는 인조반정 이후 조정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이괄의 난(1624년) 직후, 어수선하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 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신하가 사용했을 것입니다.

▲ 4마패 앞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요? 조선시대 암행어사가 제도화된 것은 인조 때부터이기 때문입니다. 암행어사는 왕이 삼정승에게 당하관 중에서 평소 청렴하고 정직하여 특명을 충실히 받들 수 있는 사람을 각자 여러 사람을 추천하도록 한 후, 임명하였다고 합니다. 인조는 젊은 신하들을 직접 암행어사로 임명하여 왕명을 적은 봉서(封書)와 직책인 사목(事目)· 신분증인 마패· 검시 등을 할 때 사용한 유척(鍮尺) 등을 수여하였습니다. 봉서는 남대문을 나서야 뜯어 볼 수 있었고, 그제서야 누가 무슨 도의 암행어사로 가는지 신분표시와 임무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생은 4마패가 했을 역할에 주목합니다.
“인조반정 이후 어수선하던 시기에 민심을 살피며 백성들의 형편을 살폈던 암행어사가 사용했던 마패란 걸 생각하면, 그 어떤 것보다 가치가 있지요. 그 숨결이 느껴져. 전국을 돌아다니며 많은 고서화를 구입해 왔는데 마패에 가장 애착이 가는 이유지요.”

▲ 신찬호 선생님

신찬호 선생은 전국을 돌며 수집했던 일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마패를 보며 느낀다고 합니다. 고위 공직에 오르는 이마다 위장전입이다, 병역기피다 구설수에 오르지 않는 이가 없고, 공직비리와 부패한 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일까요? 타박타박 짚신 신고 지방을 돌며 수령의 치적과 뭇 백성의 형편을 살폈던 암행어사가 그립습니다. 민초들은 어디선가 “암행어사 출두요~‘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암행어사 없는 세상, 사람들은 마패에 관심을 갖고 누구나 한 번쯤 어사를 꿈꿔 봅니다.

 

신찬호 선생은 본지 703호 어르신에게 듣는다의  '송탄쇼핑몰거리 고서화 수집가 신찬호' 편에 소개된 바 있다. 한편 신찬호 선생의 고서화는 3월 16일 KBS2 ‘생생정보’(저녁6시 30분 부터 방송)을 통해서도 방송 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