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세 안재홍 선생 고택 건축 100주년기념①
평택시민신문-민세 안재홍기념회 공동 인터뷰
천관우 선생 어렵게 칩거중에 민세선집 발간에 혼신 다해
30년간 민세선집 발간 하고 있는 김경희 지식산업사 사장
| 올해는 우리 고장 평택출신의 독립운동가 민세 안재홍 선생께서 기거하던 고덕면 두릉리 고택이 건축 100년이 되는 해다. 또한 민세가 중심이 됐던 1930년대 조선학운동 8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에 <평택시민신문>은 민세안재홍기념회와 공동으로 민세 안재홍 선생 선양에 깊은 인연이 있는 한국사회 각계 인사들과의 대담 인터뷰를 마련했다. 처음으로 만난 분은 김경희 지식산업사 사장으로 1981년부터 2008년까지 30년에 걸쳐 민세 안재홍 선집 전 8권을 간행, 민세연구와 기념사업의 토대를 놓았다. 조동일의 ‘한국문학통사’, ‘박경리 전집’ 등 출판문화역사상으로도 한국 인문학 진흥에도 크게 기여했다. 2월 19일 오후 서울 지식산업사에서 민세 선집 발간의 뒷이야기, 민세와 천관우 선생 관련 이야기 등을 진솔하게 들었다.<편집자주> |
민세는 일제 말에도 요시찰 인물
민세 선생과는 어떤 인연이 있으신지?
“저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 출신이지요. 역사에 관심이 있어 사학과를 갔어요. 최근 민세상을 수상한 한영우 박사가 저와 서울대 동기입니다. 한영우는 평택과 인연이 있는 ‘정도전’도 연구했죠. 국문학자 조동일 교수는 후배고, 김지하 시인은 목포중·고 후배예요.
민세상 받은 분들이 저하고 인연이 깊어요. 내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출판인의 길을 걸어 온 바탕이 바로 열린 민족주의를 주창한 민세 선생의 영향 때문이에요. 학생시절 민세 선생의 글이 교과서에 실려 있어 늘 존경했던 분이구요”
민세 선집 발간을 시작한 천관우 선생과 민세 선생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천관우 선생께 들은 이야기인데 천관우 선생도 일제 말기에 학병 회피하느라 은거하던 어느 날 자신이 숨어 있던 서울 집에서 민세 선생과 만났다고 해요. 그 때 민세 선생은 일본의 요시찰 인물이고, 민세를 암살한다는 정보 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 가시고 서울 시내 곳곳을 숨어 다니셨다고 해요”
천관우 선생도 상당히 감격했겠어요.
“그렇죠. 글로만 접하던 민세 선생을 직접 뵐 기회였으니까요. 그 며칠 천관우 선생은 우리 역사에 대한 강의를 ‘조선상고사감’을 쓴 대학자였던 민세에게 직접 개인적으로 들었다고 해요. 민세는 꼼꼼히 메모해 가면서 우리 역사의 흐름과 가치를 천 선생에게 가르쳤답니다. 민세의 메모를 천 선생은 상당기간 동안 보관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 짧은 만남이 훗날 천관우 선생을 민세의 뒤를 잇는 언론인이자, 고대사학자로 만들었지요”
천관우 선생은 1978년에 창비에 민세 연보를 발표하셨죠?
“그래요. 그 때 천 선생은 박정희 정권을 반대하는 일을 하다가 거의 집안에 유폐되다시피 했지요. 저도 천 선생이 대학시절 은사라 가끔 집에 들리곤 했는데 당시에는 정보부의 요시찰 대상이라 많이 부담스러웠지요. 아마 천 선생이 그 힘든 시기에 하신 가치 있는 일이 ‘민세연보’ 정리일 거예요. 그 때 그 일이 민세 연구와 정리의 시작이지요. 지금도 천관우 선생의 ‘민세연보’는 인물평전의 중요한 자료로 인용되고 있어요”
부인 김부례 여사가 한국전쟁중에도 원고 잘 보관
민세 선집 간행에 김 사장님이 참여하는 계기는.
“하루는 천관우 선생 집에 갔는데, 민세 원고를 보여주시면서 정리해서 우선 선집으로 만드는 일이 왜 중요한지 말씀해 주셨어요. 이익이 나는 책은 아니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돈이 되는 대로 한 권씩 내보자는 말씀이셨죠. 그게 벌써 30년이 됐네요. 당시는 쉽지 않았어요. 더구나 민세가 납북인사라 사회적 공감 형성이 쉽지 않았구요”
민세가 다산을 재평가했듯 민세를 재평가 한 사람이 바로 천관우 선생이죠?
“그럼요. 오늘날 민세기념사업회가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 기초를 놓은 사람이 바로 천 선생이지요. 민세사업회는 천 선생의 공적을 잊으면 안돼요. 그 어려운 형편에서도 끝까지 선집 간행에 거의 혼신의 힘을 다한 분이지요.”
그 천관우 선생의 가족이 어렵게 산다고 들었어요.
“그래요. 연로하신 부인이 계신데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들었어요. 민세사업회에서 나서서 도움을 주면 좋겠어요. 이 분 때문에 민세가 이제 새롭게 조명되고 있고 민세상까지 제정, 시상하고 있으니 관심을 가지면 좋겠어요. 도울 수 있는 방안을 꼭 생각해 보세요. 그게 민세 선생의 뜻일 겁니다”
민세 선집 간행에 애쓴 다른분은?
“그야 민세 선생 부인 김부례 여사지요. 일제와 한국전쟁 중에도 민세의 원고만은 꼭 가지고 다니신 분입니다. 이 분이 원고를 잘 보관했기에 천관우 선생이 선집을 간행할 수 있었죠”
민세 선집 간행 하던 중에 지식산업사에 화재가 나서 한동안 힘드신 적도 있다면서요?
“80년대 중반인가 출판사에 화재가 났어요. 그 불로 지식산업사를 창립한 형님이 돌아가시고 딸아이와 직원 몇 사람은 병원에 입원도 했어요. 그런 중에 김부례 여사가 전화를 했어요. 출판사에 화재가 난 것은 모르시고 어제 밤 꿈에 민세 선생이 나타나, ‘내 원고는 잘 있다’는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제게 ‘민세 선생 원고 잘 있냐?’고 물어보신다고 전화하신 겁니다. 그 때 큰 충격을 받았지요. 김부례 여사의 그 열정과 신심이 놀라웠어요. 제가 그 이후 어려운 가운데도 민세선집 간행을 무사히 마친 것도 김부례 할머니의 정성에 감복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민세선집 5권이 나오던 해에 돌아가셨어요”
민세 배출한 평택 정신문화 융성한 도시로
민세 선생이 복권되는데 도움을 준 분도 많다면서요?
“80년대 후반에 김부례 여사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제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국민대 교수이던 조동걸 박사에게 지속적인 방안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했어요. 노태우 대통령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었던 김학준 박사의 도움이 컸어요. 아마 윗분께 민세는 납북당한 분이고 우파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니까 이제는 민주화시대를 맞아 복권되면 좋겠다는 건의를 드렸던 것 같아요. 덕분에 1989년 3월 1일 민세가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아 그나마 김부례 여사에게 도움이 됐다고 봅니다. 이 일에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컸어요”
이제 민세기념사업회가 활발하게 활동해서 감회가 남다르시겠어요?
“그래요. 2000년엔가 제가 평택 민세생가에서 열린 추모식에 처음 가서 회고담을 한 적이 있는데 이제는 평택시와 조선일보사 등이 나서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민세선집을 간행한 저로서도 보람이 커요. 책도 많이 내고, 민세상도 시상하고, 학술연구도 많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민세는 학자라서 특히 책을 많이 내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해요”
민세 정신과 관련해서 평택시민들에게 꼭 해주실 말씀은?
“민세는 평택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신사에 방향을 제시한 분이지요. 우리 역사가 부정당하고 있을 때 우리의 고유한 역사를 찾기 위해 노력한 그 열정만으로도 높이 평가해야죠. 이제 민세가 추구했던 세상이 서서히 오고 있어요. 민세의 가치를 세상이 점점 크게 느끼게 될 겁니다. 평택도 이런 분을 배출한 도시답게 정신문화의 융성에 더 노력해야 할 겁니다. 민세를 평택의 자부심으로 만들어 나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