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移設)위기에 내몰린 조광조·오달제 유허비(遺墟碑)의 향토사료적 가치를 생각한다.-3
임석동(중앙동주민자치위원, 73세)
이충 택지개발로 현 위치에서 다른 곳으로 옮길 예정인 정암 조광조와 삼학사 중의 한사람인 오달제의 유허비 이전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중앙동 주민자치위원회 등 주민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본보 153호 7면기사·이번호 1면기사 참조> 이러한 가운데 서정동에 거주하는 임석동(林錫東·73)씨가 이설(移設)을 반대하며 '조광조 오달제 유허비'의 향토사료적 가치 등을 밝히는 글을 기고해 왔다. 이에 본지는 향토문화유산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며 이 기고문을 4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1.조광조 오달제 유허비 소개
2.조광조 오달제와 송장(松莊)과의 관계
3.유허비의 향토사료적 고찰 및 가치 발현 방법(1)
4. 유허비의 가치발현을 위한 방법(2)
정조때의 유허비 '금석문' 분류... 삼강오륜의 윤리관 심어준 상징물
4. 조 광조 오달제 유허비의 향토사료적 가치
정암과 오학사의 유허비는 금석문( 金石文)으로 분류되는 사료(史料)이다. 금석문은 어떤 역사적 사실을 해명하는데 확고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주기 때문에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사료이다.
정암의 유허비는 적소(謫所) 화순에 하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오 학사의 유허비는 출생지로 알려진 용인 원삼면에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송장에 유허비가 세워질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며 두 분이 이 곳에 머물러 살았음을 밝혀주는 확고한 자료이다.
성리학을 건국의 이념으로 했던 조선시대 500년 동안에 유능하고 박학한 선비가 많았지만 사상과 행위가 일치하게 절의(節義)를 지킨 명유(名儒)는 열 손가락으로 셀 정도다. 그 중에서도 정암과 오학사는 우뚝한 존재로 남는 분이다. 이런 희대(稀代)의 명유가 112년의 시대의 차를 두고 이 고장에서 살았다는 사실은 오늘 이 고장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음미해 볼 가치가 있는 사료이다. 우리 향토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며 한 단계 끌어 올려놓는 사료이다.
이 유허비가 200여년 밖에 안 되는 것이지만 비의 형태나 비문의 체제나 내용이 어쩔 수 없이 그 시대의 문화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니 만큼 그 시대 금석문의 연구자료로서의 가치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비석에 두 분의 유허를 새긴 유허비도 희소한 예로 기록 될 것이다. 1800 년대만 해도 송장과 같이 궁벽진 곳에서 유허비를 세운다는 것은 오늘날 기념관을 하나 짓는데 비할 만큼 어려운 공사였을 것이다.
유허비는 세워지자마자 비를 세운 유림의 뜻과는 관계없이 근동의 민속신앙의 대상이 되어 신격화되고 성역화 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민속신앙의 흡인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주는 사료이기도 하다. 이 유허비에는 '송장'이라는 위치를 확인시켜 주는 전액(篆額)이 있어 이 지역이 옛날 '송장'임을 밝히는 확고한 증거물이 되고 있다.
송장부곡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조까지 존속돼 왔던 부곡제도에 의한 행정 구획의 하나였는데 일부 이설(異說)이 있기는 하지만 특수 신분의 주민들이 살았으며 그들에게 맡겨진 일은 무기제작등 국가에서 요구하는 물품을 생산하는 일을 강요당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곡의 역사가 긴 만큼 이 지역에 행정부서를 둔 역사가 멀게는 신라말, 가깝게는 고려 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평택의 향토사의 연대가 확대되는 사료이기도하다.
모든 문화유산은 작거나 크거나 제자리에 놓여있을 때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다. 이 비석은 원래 세워졌던 위치에 그대로 보전된 것으로 귀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끝으로 이 유허비가 세워진 시기의 시대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이 유허비의 사료적 가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해서 언급하려고 한다.
유허비가 세워진 '숭정기원후 삼경신'은 1800년 정조 24년으로 정조 재위 마지막 해다. 이시기는 임진·병자양란으로 피폐(疲弊)해진 경제, 문란해진 사회제도가 영조의 탕평책 균역법등의 시행으로 점차 안정을 되찾아 조선왕조의 중흥의 기운이 일어날 때이다.
한편 천주교와 더불어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실사구시의 학풍이 널리 일어날 때였으니 성리학을 건국의 이념으로 세운 조선왕조가 왕권을 튼튼히 다지기 위해 절의가 뛰어나고 학덕이 높은 명유(名儒)들의 공덕과 학행(學行)을 널리 선양(宣揚)하여 백성들에게 삼강오륜의 윤리관을 심어주려는 정책적 배려가 지방 유림(儒林)에게까지 미치게 되어 유허비를 건립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암 사후 281년. 오 학사 사후 163년이 되는 때이다.
5. 조 광조 오 달제 유허비의 가치 발현을 위한 방법적 고찰
가. 조 광조 오 달제 유허비의 공식표기를 바꿔야 한다.
현재 평택시와 문화원 등에서 펴내는 향토소개 간행물이나 평택시청 홈페이지 문화유적 소개에는 예외없이 '조 광조 오 달제 유허비'를 '충의각'으로 표기하고 있다.
옛날부터 '오학사비'로 불리던 것이 '충의각'으로 표기하게 된 것은 1960년대 이 지역 독지가 서정태씨가 비각을 세우고 '충의각'이라는 현판을 달고부터다. 비각을 세울때부터 행정기관과 합의가 이루어졌었는지는 모르지만 유물 유적의 명칭은 누구나 쉽게 내용을 알 수 있도록 붙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허비 비각에 '충의각'이라는 현판을 붙였다고 해서 유적의 명칭을 현판대로 정해서 공식화시킨 것은 문화행정을 담당한 분들의 안이한 발상 때문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유적의 실체를 제대로 확인했더라면, 문화유적의 명칭의 파급효과가 얼마나 큰지 조금이라도 염두에 두고 명명(命名)했더라면 40여 년간 실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이름으로 조 광조 오달제 유허비가 가려져야 하는 불행은 없었을 것이다. 내용과 뜻이 모호한 명칭을 내용과 뜻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이름으로 고쳐야한다. 이미 다른 지방에 있는 유허비의 경우도 주인공의 이름을 넣어서 알기 쉽게 표기하는 것이 보편화돼 있다.
어떤 고장에서는 한 인물을 놓고 서로 자기 고장 사람이라고 우기며 끌어가려는 웃지 못할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데 금석문으로 확고하게 증명되는 평택의 위대한 역사적 인물 두 분을 '충의각'이라는 모호한 명칭으로 가려서 숨겨둘 이유는 없을 것이다. 명칭을 듣거나 보고 즉각 구체적 개념이 떠오르는 고유명사로 고쳐야한다.
나. 유허비와 송장부곡 유지(遺祉)를 포함한 일정 구역의 공원화와 영구보전대책
평택시는 21세기 동북아 물류중심도시로 도약하려는 웅지를 품고 이미 힘찬 출발을 했다. 20만의 소도시에서 50만 100만의 미래의 대도시로 성장하기 위해서 도시확장이 불가피한데 친환경적 균형발전이라는 현안을 해결해야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이에 맞춰 평택시는 아름다운 전원·환경도시로 발돋움 할 것을 밝히고 있다. 또 함께 하고 나누는 복지·문화도시로 발전하는 평택을 선언하고 있다. 질 높은 삶을 지향하는 시민의 꿈을 펼칠 수 있는 미래를 약속하는 고무적인 선언이다.
이러한 크고 화려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계획단계에서 구체적인 시행과정까지 시민에게 공개되고 시민의 의사가 존중되는 것은 물론 각 전문기관의 의견과 비판을 충분히 검토해서 시행해야 할 것이다. 목전의 전시효과나 개발 이익을 우선해서 향토문화유산을 훼손 내지는 이전 보존하려는 편의주의 반문화적(反文化的) 발상을 경계(警戒)해야한다.
유허비는 그 특성상 옮겨놓을 경우 생명을 잃는 것이다. 이미 오 학사의 옛터는 도시확장으로 도로와 건물로 변해 있지만 뜻만 있다면 그 자리를 찾아서 작은 돌에다 "충렬공 오 달제 구거지"라고 새겨 세우는 관심쯤은 보일 만 하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향토문화유적이 있는 자연공간을 가급적 원형에 가깝게 확보해두고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케 해서 향토문화유산을 가까이 하고 향토사에 관심을 유발시켜 문화유산에 대한 애호심과 지역공동체 의식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게 해야 한다.
공원 경내에는 송장부곡과 유허비에 대한 자료실과 청소년 수련원, 공연장, 전시장 등 시설을 갖추고 문화예술 각 분야에서 정암과 오학사를 기리는 내용의 공연이나 전시가 수시로 열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고 시민 동호인 단체활동을 적극 지원 육성해야 한다. 그리하여 역사가 오늘을 사는 우리 삶의 활력소로 작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 관내 문화재에 관한 연구와 홍보를 활성화시키고 정확하고 심도 있는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
문화재나 유적에 관한 체계적 연구를 전문기관에 위촉해서 역사적 문화적 학술적 가치를
공인받고 시청 홈페이지의 문화재 소개를 체계적이고 다양하게, 정확하고 깊이 있는 내용으로 개편하여 전국 어디서나 신속하게 평택의 문화유적을 찾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향토사연구모임을 지원 육성하여 답사 조사 기록 연구 발표 과정에서 생기는 애로사항들을 풀어주는 일에도 행정당국의 역할이 요망된다.
<유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