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심창, 그를 기억한다
1회 평택지역 원심창 의사 재조명과 지역정체성 회복
회복원심창 선생 서거 41년 만에 고향에서 추모식
선생에 대한 본격적인 재조명 열기 일으켜
“나는 수많은 혁명동지들과 어울려 보기도 하고 사선을 뛰어넘기도 하였으나 그중에서도 원심창 의사는 진선진미의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었다” -상해 육삼정의거 동지이자, 광복회장을 역임한 이강훈 선생
“국제적으로 저명한 무정부주의자이자, 겸허한 민족도의를 제창한 국경을 초월한 인간애를 지닌 인물”- 원심창 의사가 창간한 일본 최대의 교포신문 통일일보 회장을 역임한 이영근 회장
지인들로부터 진선진미의 마음씨를 지닌 이, 시대의 무정부주의자이자 인간애를 지닌 인물로 평가 받는 인물 원심창.
우리 고장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에서 태어나 일생을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반공산주의자, 반독재 통일운동가로 헌신한 독립운동가이지만 원심창 선생에 대한 기억은 그가 난 이 지역 평택에서 조차 찾기 힘들다.
그러던 올해 7월4일, 팽성국제교류센터에서 원심창 선생을 기리는 추모식과 학술행사가 열려 그에 대한 기억을 다시 한번 두드렸다.
원심창 선생 서거 41년 만에 처음으로 선생의 고향에서 제대로 열리는 추모식이었다.
물론 이 ‘추모식’ 자체는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는 첫걸음은 아니었다. 이미 지난 1977년 원주원씨종친회에서 ‘의사 원심창’ 자료집을 발간했는가 하면, 1991년 선생이 나온 초등학교 동문회를 중심으로 성동초등학교 교정에 ‘원심창 의사상(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건립 등이 있어 그에 대한 조명을 시도했던 바 있다. 하지만 조직적으로 추모 열기를 이어 가기에는 다소 역부족이었다.
이번 추모식이 남다른 의미를 갖는 것은 추모식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추모사업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추모사업으로 본격적인 재조명에 들어간 원심창 선생. 그렇다면 과연 오늘의 평택에게 ‘원심창’ 그가 줄 수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해방 전엔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엔 반공산주의자 반독재 통일운동가로
불꽃같은 삶이었다.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반공산주의자, 반독재 통일운동가. 그의 앞에 붙는 수식어들이다. 출발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1906년 팽성읍 안정리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원심창 선생은 1918년 성동초등학교의 전신인 평택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3월 평택에서도 3.1운동 열풍이 일어나고 당시 14세에 불과했던 선생 또한 3.1운동에 참여한다. 1920년 3월 서울의 중동학교(창설자 최규동)에 입학했지만 2년 후 중퇴한다.
1923년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인 도쿄로 유학을 떠나 일본대학 전문부 사회과에 입학한다. 이 기간중 무산학생학우회 임원으로 활동했으며, 또한 동경조선무산자동맹에서도 활동한 바 있다. 학비를 조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2년을 채 못 채우고 대학을 자퇴한다. 이무렵 신사상에 관심을 갖고 아나키즘 사상의 대표자인 크로포트킨(1842~1923)의 <상호부조론>, 오스기 사카에(1885~1923)의 저서를 탐독하며 아나키즘 사상을 키워간다.
1920년 무렵에는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과 일본으로 건너간 유학생·노동자들 가운데서 민족해방운동의 한 이념으로서 무정부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던 시점이기도 했다. 선생은 1925년부터 한국의 무정부주의운동의 근간인 ‘흑우회’ 활동에 참가하며 본격적인 아나키스트의 길을 걷는다.
1926년엔 흑우회 재건을 위한 활동에 참여하며 같은 해 7월엔 박열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자살 진상조사에 착수했는가 하면, 11월에는 흑색운동사를 ‘흑색전선연맹’으로 변경, 일본의 아나키스트 단체회의 개최를 담당하는 한편 ‘흑색청년연맹’에 가입해 한일아나키즘 운동의 공동전선을 형성했다.
1930년 원심창은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북경으로 망명한다. 1930년 상하이의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은 남화한인청년동맹으로 개편되던 시점이었고 산하에 남화구락부를 두고 기관지 ‘남화통신’등을 발간하는 등 영역을 넓혀가며 활발한 활동을 펼쳐가고 있었다.
1930년대 당시 상하이는 국내·만주 지역과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들어 다양한 조직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국·중국·일본 3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은 함께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했고 이후 구국연맹 행동부에서 친일화한 왕정위의 저격, 아모이의 일본영사관폭파사건으로 이른바 ‘흑색공포단’으로 이름을 알리며 일제를 공포에 몰아넣기도 했다. 1932년에는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뒤이으며 해외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분위기는 극렬하게 치닫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남화한인연맹에 속해있던 원심창 선생은 1933년 3월17일 백정기, 이강훈 의사와 의기투합해 상해 육삼정의거를 계획 주도한다. 육삼정의거는 상하이 진주 일본군사령부와 아라요시 공사가 중국정부 요인의 매수공작을 위해 중국 요리점 육삼정에서 연회를 베푸는 기회에 기습공격을 가해 주중 일본 공사를 암살하려던 것으로 일제하 해외 3대 의거 중 하나로 알려지기도 했다. 거사는 직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여파는 컸다. 다음날 아침 상해와 북경·남경 등 각 신문은 일제히 이 암살계획에 대해 대서특필했고 한국인의 항일의식을 드높였다. 이후 세 사람은 일본으로 압송되고 백정기 원심창 두 의사는 무기징역을, 이강훈 의사는 15년형을 선고받는다. 복역 중 1936년 백정기 의사는 먼저 순국했고 원심창, 이강훈 두 의사는 1945년 해방의 날까지 13년간 옥중에서 모진 고난을 겪는다.
해방 이후 원심창 선생은 일본에서 뜻을 이어간다. 박열, 이강훈 선생과 함께 재일본 거류민단을 창립, 초대 사무총장, 제3대 단장을 맡아 재일동포 권익증진에 노력했다. 이 시점 선생의 움직임은 반독재 통일운동가로 성격을 강화했다. 해외 최초 자발적 통일운동 단체인 통협을 결성해 남북 평화통일 운동으로 이어갔는가 하면 1959년 일본 최대 교포신문인 통일일보의 창간대표를 맡으며 반독재 통일운동에 헌신했다. 현재 통일일보는 20만 부를 발간하는 신문으로 성장했으며 북한과 남한에 대해 균형있는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1971년 7월4일 동경, 선생은 65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재일 민단은 사회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했으며 이후 선생의 항일, 통일운동의 정신을 기려 재일동포 중 처음으로 ‘의사’ 칭호를 부여받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도 사후인 1977년 선생의 드높은 애국정신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유해는 유언에 따라 동경 교외 대행사에 모셨지만 이 후 천안 망향의 동산 조성시 제1호로 안장됐고 현재는 국립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
변화 거세질수록 각별해지는 정신적인 교훈들
지역차원에서 육삼정 기념식, 학술행사로 이어져
오늘 날 평택. 비전동 성동초등학교 교정에는 1991년 성동초등학교 동문회가 세운 원심창 의사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선생의 뜻을 기리고 추모하자는 의미로 세워진 동상의 시선은 평택에 다가오는 모든 변화를 관조한다는 듯 지역을 향해 있다.
원심창 선생은 말했다.
“우리의 통일운동은 우리 손으로 성취한다는 자각이며 우리의 통일운동을 스스로의 힘으로 추진한다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상적 원칙은 첫째, 민족 자결의 원칙이고, 둘째 평화의 원칙이며 셋째, 민주주의의 원칙 넷째, 국가동권의 정신에 입각한 국제 협조의 원칙이다.”
“물욕도 권세욕도 다 버려라 ! 물욕 권세욕을 모두 버리면 형제간의 우애도 두터워지고 집안이 평화로와 좁은 방에서도 사이좋게 살 수가 있는 것이다. 권세를 누리던 자 그 누가 영원한 자가 있었던가.”
일전에 남긴 그의 말이 삼성전자 유치, 브레인시티, 고덕신도시조성, 미군주둔 등의 다양한 변화와 과제를 떠안고 있는 평택의 오늘을 울린다.
원심창의사 등 평택에서 특히 지조있는 역사인물에 대한 재조명은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아니다. 발전을 향해 갈수록 변화와 함께 수반되는 지역 색의 희석과 지역 내 갈등을 이겨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하나의 연결고리다.
지역정체성을 확립해 시민의식을 고취하고 지역통합을 이루기 위한 움직임은 뜻있는 지역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임진왜란 선무일등공신이자 칠전량 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한 원릉군 원균장군,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가 죽음으로 조선선비의 기개를 보인 홍익한 학사, 일제하에서 아홉 번에 걸쳐 7년 3개월 옥고를 치르며 비타협민족주의를 이끈 안재홍 선생, 일제하 해외 3대의거중 하나인 ‘상해육삼정 의거’를 주도하며 광복의 그날까지 13년간 감옥생활을 한 원심창 의사. 2000년 기념사업 창립 후 가장 활발한 재조명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민세 안재홍 선생을 비롯해 원균장군도 다양한 홍보사업을 통해 임진왜란을 이끈 대표적인 무장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홍익한 선생에 대한 조명은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몇차례 학술행사가 열려 삼학사의 정신에 대한 현대적 평가가 나오고 있다.
원심창 선생에 대한 추모는 1977년 원주원씨종친회에서 ‘의사 원심창’ 자료집 발간, 1991년 선생께서 나온 초등학교 동문회를 중심으로 성동초등학교 교정에 ‘원심창 의사상(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건립등이 있었다. 지난 2009년 평택시와 국가보훈처의 지원으로 민세안재홍기념사업회, 평택문화원,원주원씨종친회 등이 공동으로 ‘원심창의사 재조명 학술행사’를 개최해 일제 강점기와 해방전후 원심창의사의 항일반공운동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져 학술연구서를 모은 논문집도 발간할 예정이다. 2012년 7월4일엔 돌아가신지 41년만에 처음으로 평택에서 추모식과 학술행사가 열렸다. 원의사의 모교인 성동초등학교는 2013년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지역언론사, 시민단체 등과 함께 상해육삼정의거 80주년 행사를 기획하며 오늘을 사는 평택에게 평택의 뿌리와 정신에 대한 성찰을 평택의 큰 인물 속에서 재발견해가고 있다.
원심창 의사 조가(弔歌)
노산 이은상 지음
1. 우리님 한평생 66년을 제한몸 부귀영화 다 버리고
꿈속에도 조국과 겨레를 위해 정도를 지켜사신 원심창 의사
2. 언제나 어디서나 불사조같이 원수의 옥속에서 호령하셨소
물불과 총칼앞에 두려움없이 의기로 살고가신 원심창의사
3. 통일을 못이루고 가시는 님이 눈인들 편안히 감으시릿가
님의 뜻 우리들이 받드오리다 비노니 고요히 잠드옵소서
(후렴)
뼈는 비록 이역땅에 묻히신대도 혼일랑 조국으로 돌아오소서
그 이름 그 정신 길이길이 우리들 가슴속에 깃드옵소서
△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 - 일본에서의 투쟁 (김명섭 지음)
△ 민세안재홍기념사업회/평택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
2011 평택보훈학술대회 자료집 ‘원심창의 항일 반공투쟁과 자유공동체 사상’ (김명섭 교수)
* 이 기획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