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運命)을 달리해? 유명(幽明)이겠지
우리말글 사랑방
강 상 헌 논설주간. 우리글진흥원 원장
한자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이 한자로 된 단어를 사용할 때는 특히 주의해야 한다. 한 신문의 어떤 표현은 이런 상황을 절실하게 드러낸다. 이런 사례가 자주 일어나다보니 이제 독자들도 둔감해지는 것 같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 노출되는 학생 등 다음 세대들이다. 자주 보면 믿게 되는 것 아닌가?
‘죽었다’는 표현 대신 ‘운명을 달리하다’라고 그 기자는 썼다. 운명은 運命과 殞命의 두 단어가 생활에서 비교적 자주 쓰인다. 소리 같고, 뜻 다른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다.
運命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다. ‘운명의 힘’ ‘운명에 맡기다’처럼 쓴다. 殞命은 ‘목숨이 끊어짐, 죽음’이고 ‘운명했다’처럼 쓴다.
‘운명을 달리하는 것’이 넓은 뜻이나 비유적 표현으로 ‘죽는 것’을 나타낸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일반적인 말은 아니다. ‘運命을 달리 한다’고 하면 ‘서로 다른 길을 갔다’ 정도로 억지 해석이 가능하기는 하겠다. 그러나 이도 썩 들어맞는 표현은 못된다. ‘殞命을 달리하다’는 말이 안 되는 말이다.
왜 이런 표현을 했을까? 필자 생각으로는 기시감(旣視感) 즉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에 의한 착각이 원인인 것 같다. 기시감이라 하면 좀 생소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프랑스어 출신 국제어인 데자뷔(deja-vu)라고 하면 금방 알 사람들 많다. 영화와 관련한 얘기 때문에 익숙해진 단어다. 대충 ‘어디서 본 듯한 기분’ 정도의 뜻이다.
‘유명(幽明)을 달리하다’라는 표현이 ‘죽었다’와 가장 가깝다. 죽음이 일상(日常)의 흔한 체험이 아닌 까닭에 어느 언어이건 이를 표현하는 어휘는 큰 무더기다. 유명을 달리하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여기에도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幽明은 우리가 죽어서 가야할 저승[幽]과 지금 성실히 살고 있는 이승[明]을 함께 나타낸 말이다. 저승과 이승이다. 말뜻 그대로는 ‘어두움과 밝음’이다. 그러나 낱낱의 말에는 속뜻이 있다. 특히 한자의 속뜻 보듬는 기능은 탁월하다.
한 번 더 조심, 그 ‘유명’에도 동음이의어가 있다. 유명(幽冥)은 그윽하고 어둡다는 말, 즉 저승이다. 혹시 한자로 써야할 경우에 ‘幽冥을 달리하다’라고 쓴다면 이는 틀린 표현이다.
이렇게, 한번 본 듯한 어감 때문에 좀 멋을 내 보겠다고 선택한 ‘문자’는 틀릴 확률이 높다. 그 확률의 수치는 그 사람의 ‘문자 속’과 같이 간다.
하루아침에 문자의 원리를 다 터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맞닥뜨릴 때 미루지 않고 자신의 지식창고를 그때그때 착실히 채워간다면 그는 ‘지식인’의 자격이 있다. 사전이야말로 지식인의 ‘절친’이다. 또 필자처럼 자신의 무지(無知)를 항상 새롭게 깨닫는 용기와 철학도 필요하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참 유용한 말씀 있으니 한번 다시 새기는 것이 좋겠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