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식 칼럼 - 행복한 삶으로의 초대] 우리의 원천을 알라 ③

2011-08-25     평택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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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효명고등학교 교장

샤르트르는 이렇게 세상 관계 속에서, 그런 관계를 이어가는 자신에게서 역겨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샤르트르는 또 <벽>이라는 작품에서 삶의 극한상황, 절망과 부조리의 세계 속에서 몸부림치는 사형수의 초상을 그린다. 샤르트르에게 있어서 옳고 그름의 판단이 모호한 세계, 부조리가 판을 치는 이 세상이야 말로 벽 그 자체였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루하루 살다보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벽을 만나고, 또 구역질도 느낀다. 그래서 아파하고 절망한다. 심각한 경우 삶의 회의감 마저 느낄 수 있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학교가, 이 사회가 벽 자체 일 수 있다. 힘든 공부로 내몰리는 현실에 구역감을 느낄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는 삶의 회의감으로 고통 받는 많은 학생들을 만난다. 이는 가치관의 부재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틀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영적 전통과 형성 전통을 잘 수용하고, 창조적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가치관의 확립이 중요하다. 언제까지 세상을 벽으로만 바라보고, 험난한 세상 살이에서 구토만 하고 있을 수 없지 않는가. 단 한번 뿐인 인생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세상을 마치는 그 날까지도 세상이 벽으로 보이고, 그동안의 세상 살이에서 구토감을 느낀다면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이 있을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나 자신의 초월성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힘없고 나약한 그런 존재가 아니다. ‘나’는 초월적인 존재다. 한마디로 ‘나’는 늘 뛰어넘는 존재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테니스 하나 칠 때도 잘 하려고 한다. 수영을 배울 때도 남들보다 잘 하려고 한다. 미술을 그리고 음악을 듣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뻐지려고 노력하고, 인격을 도야하려는 욕구가 있다. 눈을 더 잘 보려고 하고, 손을 좋은 일에 쓰려고 한다. 정신은 좀 더 의미 있는 것을 좆으려 하고, 마음은 선한 행동을 하려 한다.

이렇듯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꿈꾼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고 본성이고 핵심이다. 그럼에도 동시에 인간은 그 초월성을 쉽게 잊어버린다.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나약하기 때문이다. 말초적인 것에 현혹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월할 수 있는 눈을 빼앗기고, 마음을 빼앗기고, 정신을 빼앗긴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살다보면 궁극적으로는 허무감만 남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초월적인데, 초월을 잊고 살다보니 허전함을 느끼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초월성을 성취해 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