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헌 칼럼] 문자 쓰다 불신 부르는 사회…

강상헌 <본지 논설주간>

2010-07-22     평택시민신문
▲ 강상헌 논설주간

어려운 말을 써야 유식한 사람이고 좋은 글인가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 중 하나가 아닌가 해서 같이 생각해 보시자고 이런 주제를 들었습니다.

인터넷 신문이라는 제목이 붙은 어떤 웹페이지에 ‘충청도 괴산의 산골마을에서 고구마를 서울의 한 아파트 부녀회에 공수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는 글이 실렸더군요. 서울의 유명한 신문의 한 기사에도 ‘서울 강동구의 낙엽을 긁어모아 남이섬으로 공수한다’는 글이 실렸습디다. 좋은 식재료를 공수하여 요리한다는 소위 맛집 글을 요즘 거의 날마다 봅니다.

‘공수(空輸)한다’는 말은 비행기로 실어 나른다는 말입니다. 항공수송이지요. 우리 사회의 ‘기자 선생님들’ 중 상당수가 공수라는 말을 산지(産地)에서 직송(直送)한다는 말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읽고도 이 글 주제의 뜻을 짐작하지 못하시겠다고요?

‘예상하다’ ‘예측하다’를 ‘생각하다’라는 말로 사용하는 사례를 신문과 방송에서 흔히 봅니다. 예상(豫想)은 ‘미리 생각한다’, 예측(豫測)은 ‘미리 잰다’는 말이지요. ‘앞서서’ ‘미리’라는 뜻의 예(豫)자를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니면 ‘생각한다’라고 쓰던지요. “비가 올 예정(豫定)”이라는 뉴스 일기예보는 아마 “비가 올 것으로 예상”의 잘못이겠지요.

 ‘지양하다’라는 말을 쓰는 이가 꽤 있습니다. 철학이나 논리학에서 쓰는 용어 지양(止揚)을 활용하는 단어인데, ‘피하다’ ‘삼가다’ ‘하지 않다’의 뜻으로들 씁디다. ‘더 높은 단계로 오르기 위하여 어떠한 것을 하지 아니함’이라는 일반적인 뜻풀이만 보아도 요즘 유식한 일부 인사들이 쓰는 ‘지양하다’는 말은 심히 사용법이 어색합니다. 

‘변증법(辨證法)의 중요한 개념으로, 어떤 것을 그 자체로는 부정하면서 오히려 한층 더 높은 단계에서 이것을 긍정하는 것’ ‘모순 대립 하는 일을 고차적으로 통일하여 해결하면서 현재의 상태보다 더욱 진보하는 일’ 등의 ‘지양’의 전문적인 개념까지를 함께 생각해보면 ‘피하다’ ‘삼가다’ ‘하지 않다’의 뜻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학교에 가는 와중에 누구를 만났다’는 식으로 ‘와중(渦中)’이란 단어를 쓰는 것이 요즘 유행인 모양입니다. 유명 연예인 중 누가 이 단어를 방송에서 써서 모두들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한 것일까요?

와중의 와(渦)자는 ‘소용돌이’라는 뜻입니다. 와중은 아주 어려운 일, 혼란스런 상황, 곤란한 경우에 휩쓸린 상태를 말합니다. ‘참혹한 전쟁의 와중에 우리 식구들은 헤어졌다’와 같이 써야 하는 것이지요. 학교에 가는 길목에 누구와 만난 것은 ‘학교에 가는 도중(途中)에’가 되어야 합니다.

요즘 또 방송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회자한다’는 말을 하는 이들을 봅니다. 생각해 보니 그 말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는 뜻이더군요. 고사성어 또는 사자성어라고 하여 배우는 말 중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한다’는 말을 이렇게 활용하는 모양입니다.

회자는 ‘회(膾)로도(생으로도) 먹고, 구이(炙)로도 먹는다’는 뜻입니다. 좋은 시(詩)나 문장 등이 맛있는 음식처럼 사람[人]들의 입[口]에 많이 오르내리며 평가받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숙어입니다. ‘회자한다’를 ‘말한다’로 쓰는 일부 사람들의 용법과는 뉘앙스뿐만 아니라 그 뜻도 차이가 있습니다. 뜻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이지요. 이런 현상은 실수의 차원일 수 없습니다. 개인과 사회의 ‘실패’로 인식해야 할 문제입니다. 국어교육의 부실을 탓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이런 상황에 대한 진지한 진단과 논의가 필요합니다.

우선 생각해 보기로는 자기 뜻을 글로 쓰지 못해도 대학을 졸업할 수 있는 상황을 문제 삼을 수 있겠습니다. 또 네 개의 보기 중 하나를 고르는 찍기 형 시험을 통해 공무원 등 상당 수준의 직급 또는 자격까지 얻을 수 있는 우리 사회의 공직(자격증) 채용(부여) 방식을 삿대질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인터넷에서 비슷한 내용을 찾아 따붙이기 하는 것을 공부로 여기는 우리 학교 사회의 분위기는 실은 망조의 시발입니다. ‘표절(剽竊)’이라고 모양 어려운 한자를 쓰니까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지만, 실은 ‘도둑질’이고 ‘거짓말’입니다.

쉬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어려운 용어를 써서 독자를 헷갈리게 하는 것은 글 쓰는 일에서는 하수(下手) 중의 하수입니다. 왜 자기도 제대로 모르는 어려운 단어를 일부러 끌어들여 스스로 글에 불신을 부르고 무식을 드러내며 독자를 실망시키는 것인지요.  

글공부는 밭을 갈 듯 마음을 가는 공부입니다. 경문(耕文)이란 오래된 숙어의 뜻이지요. 마음을 가는 글공부 대신 논술 요령만 외우는 공부만 해온 까닭일까요? 심지어는 ‘기자’라는 직함을 걸고 글을 쓰는 이들까지 이렇게 한심스런 상황을 보입니다. 그러고도 공부 부족한 점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자건 학자건 모름지기 글 쓰는 이의 말글살이의 기준은 일반 시민에 비해 더 엄정한 것이어야 할 줄 압니다. 이런 이들의 글에서 이런 ‘실패’가 노출된다면 그들이 하는 ‘말씀’과 ‘주장’을 우리 시민들이 어떻게 ‘평화로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겠습니까? 믿기 어렵지요.

말글 몇 조각 틀린 것 가지고 뭘 그렇게 떠드느냐고요? 중요하지 않다고요? 모르고도 이렇게 잘 살지 않느냐고요?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고, 혹 알았다면 더 못 살았을까요? 

말과 글은 뜻을 담는 그릇이면서, 뜻을 품어내는 그릇이기도 합니다. 소통(疏通)의 잣대는 굽지 않은 것이어야 합니다. 시민들의 ‘가나다’와 대통령의 ‘가나다’가 서로 달라 삐걱대는 것 같은 요즘, 이런 생각은 더 절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