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리 사람들

권 희 로의 시와 시조 세상 58

2009-06-18     평택시민신문

신대1리 새터말은 갯벌 넓은 해변이었더라

가난한 사람들이 터를 잡은 평화로운 마을

간난산고 이겨내고 황금빛 옥토 일구어

이제는 웃고 사는 새터말 우리 고장


신대2리 영창마을은 피난민들이 일군 마을

본향은 경상도 경주와 영천이었지만

일제 말 살길 찾아 철원으로 이주하였고

전쟁 통에 쫓겨 내려와 힘겹게 자리 잡은 눈물의 고향

지도자의 아호를 따라 영창이라 이름하니

달빛 창가로 웃음소리 끊이지 않는 마을이 되었더라


1·4 후퇴 그 난리에 황해도민 자리하고

서로 도와 힘이 되는 좋은 이웃 장단 마을

도두리벌 간척하랴 손톱발톱 다 빠졌지만

언제나 하나 되어 장단 맞춰 사노메라

신대리 마을 해설(김해규, 향토사연구가)
신대리는 팽성읍에 속한 마을이다. 19세기 중엽에 마을이 새로 형성되어 ‘새터’라고 불렀다. 신대리라는 지명은 신대1리 새터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 신대리 앞 도두리벌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벌이었다.

초기 정착민들은 도두리벌 안쪽을 간척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많은 수의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제1공화국 정권은 피난민 정착사업으로 개간이 가능한 바닷가와 황무지에 피난민 수용소를 건설하였다. 신대리 일대에는 장단수용소가 건설되었다.

수용소의 피난민들과 나중에 철원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은 신대2리 영창과 3리 장단마을을 만들었다. 이들은 정부에서 구호물자를 배급받아 도두리들을 간척하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간척된 토지는 소유권이 불분명하여 무려 50년 가까이 세종대학교 재단인 대양학원과 소유권분쟁을 하였다.

신대4리 말랭이는 본래 도두리에 속한 마을이었다가 신대리로 옮겨졌다. 초기 말랭이에 정착한 사람들은 한국전쟁 피난민들이었다. 1960, 70년대에는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고 경지정리사업으로 경작지가 넓어지면서 충남공주, 청양 등지의 빈농들이 이주하여 마을규모가 커졌다.

신대리의 마을들은 도두리벌이라는 비옥한 토지와 평택호로부터 풍부한 농업용수를 공급받아 풍요로운 마을을 일구었지만 최근에는 미군기지확장으로 경작지가 줄어들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