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부대, 존재와 가치의 문제

<특별기고> 전 진 규 본지 전 발행인

2002-02-23     평택시민신문
미군부대 문제로 우리 지역 사회가 시끄러워지고 있다. 지난 해 용산 미 8 군이 평택의 기존 미군기지를 확장해 이전하려 한다는 설이 나돌면서부터다. 지금까지는 미군기지라면 반대의 목소리만 크게 들렸으나 최근 일부 노장년층 인사들을 중심으로 미 8 군 유치 환영 목소리가 일자 첨예한 마찰음이 빚어지고 있다. 여기에 환영측은 우익 보수 진영임을 자처하기도 해 조그만 지역사회에 뜻하지 않은 좌우 편가르기마저 우려되고 있다.

우리 지역은 미군부대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미군이 주둔한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평택은 굳이 표현하자면 「미군 기지촌」이다. 다만 달갑지 않은 이 명칭을 애써 피하고 있을 뿐이다. 이곳에서 오래 산 시민들 가운데는 좋건 나쁘건 미군부대와 관련된 추억을 가진 사람이 많다.

6.25 전쟁 직후 폐허로 변한 이 땅에 미군은 굉장한 존재였다. 전쟁 끝이라 식량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미군부대에서 먹을 것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배고픔을 참지 못하던 사람들은 미군부대로 가서 먹을 것을 구했다. 그러면 미군들은 먹다 남은 음식을 쟁반 채 들고 나와 철조망에 깡통을 대고 서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미군이 먹다 남은 이 음식물은 「꿀꿀이죽」이라고 했다. 이 전대미문의 음식물은 '빠다'(버터)와 우유와 고기 등이 뒤범벅 된 것인데 맛이 괜찮았다. 그래서 전문적으로 미군이 먹다 남은 음식물을 수거해 꿀꿀이죽을 만들어 내다 파는 사람도 생겼다.

평택은 쑥고개(송탄의 예 이름)와 안정리 등 주변 여러 곳에 크고 작은 미 군부대가 자리잡고 있어 기지촌이 형성되고 길거리는 미군들이 활보하였다. 지역내 도로들은 우리나라 차량은 별로 없이 거의 다 미군 차량들로 붐볐다. 미군들은 차량을 몰고 도로를 달리다가 길 걷는 사람을 만나면 껌이나 초콜릿 등을 던져 주곤 했다. 그 때는 그런 미군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미군이 들어오고 난 뒤 우리 지역은 먹고 입을 것이 많아졌다. 자연히 생기가 넘쳐나게 되었다.

그리고 일자리가 귀한 시절이라 많은 사람들이 미군부대로 다투어 들어갔다. 하우스보이나 재니터(청소부)도 괜찮았다. 미군부대 일은 뭐든지 돈벌이가 되었다. 환율의 개념을 따질 때가 아니니까 몇 달라만 벌어도 큰돈이었다. 미군부대 다니는 사람들은 얼마 안가 다 잘 살게 되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취직자리가 별로 없었다. 따라서 미군부대는 꽤 귀한 직장이었다.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중국 조선족 동포들이 한국의 일자리를 귀하게 여기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평택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자들로 풍성하게 넘쳤다. 소위 양키 물건 장사로 부자가 된 사람도 많이 늘었다. 물자가 많다 보니 이를 노리는 절도도 횡행했다. 심지어는 군용 지프를 내다 팔아먹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통행이 폐쇄된 원평동 구 철길 건널목은 미군 화물차량이 단골로 습격 받는 곳이었다.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속도를 늦추는 미군 화물차량은 툭하면 털렸다. 어쨌든 평택은 미군부대 특수로 지역경기가 좋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경제가 성장하면서 미군부대 주변은 날로 쇠락해 갔다. 지난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안정리의 경우 미군 홀에서 춤추며 미군을 상대하는 소위 양색시가 수 천명에 달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서면서 이런 여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요즘도 우리 지역에는 "양놈 지갑 주었다"는 속담이 남아 있다. 뜻하지 않은 횡재를 만날 때 쓰는 말로 통했다. 기지촌 경기가 한창 좋을 때 얘기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소위 "양놈" 지갑을 주어 봐야 찬바람만 불뿐이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미군부대의 역할이 달라졌다. 우리가 단 1억 달러의 수출도 못하던 절대 빈곤 시대의 미군부대와 수출 천억 달러를 넘어선 현재의 미군부대의 위상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미군부대의 패러다임이 전혀 딴 판으로 바뀐 상황이다. 미군 주둔 초기 체결된 소-파(한미행정협정)은 지금은 상황에 맞지 않게 되었다.

미군부대가 처음 들어와 미군이 구세군처럼 보일 때도 납득되지 않은 일이 있었다. 기지촌 아이들은 가끔 꿀꿀이죽과 '빠다', 초콜릿 등을 얻어먹으면서도 길거리에서 미군차량이 지나가면 어김없이 돌을 던졌다. 돌에 맞아 유리창이 깨지면 미군은 차를 멈추고 권총을 꺼내 들고 아이들을 좇아 다녔다. 그래도 아이들은 돌 던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얻어먹긴 했지만 무의식 세계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꿀꿀이죽으로 짓밟힌 자존심과 상처를 돌 던지기로 보상받으려 했나보다. 오늘날의 반미주의는 이미 그때 미군부대 아이들의 투석전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도 볼 수 있다. 지금도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우리 한인 직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반미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미국인들은 근본적으로 인종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반미는 거의 상대의 우월주의에 대항하고자 하는 본태적인 속성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 같다.

미군은 처음에는 베푸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지금은 철저한 "기부 앤 테이크"를 거쳐 "테이크 앤 테이크"로 나가고 있다. 사실 오늘날 미군기지 내 각종 건설공사 비용과 직원 봉급 등 주둔비용은 거의 모두 우리의 국방예산에서 대고 있다. 또 우리는 선택권이 제한된 가운데 막대한 미제 무기를 사주어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 미군부대는 존재와 가치의 문제가 묘하게 얽혀 있다. 존재적인 측면에서 따지자면 미군부대 주변 주민들은 미군이 어차피 나가지 않을 바에야 서울에 있는 미 8 군 기지를 기존의 부대를 확장해서 유치하는 것이 국가적으로나 지역경제적으로 좋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반대측은 미 8 군이 수도 서울에 있으면 민족의 자존심이 상하고 지방에 있으면 그렇지 않다는 생각은 잘못이며 이미 있는 미군기지도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군부대 문제는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든 아프리카의 협해인 케이프 혼처럼 위험스런 난제다. 보다 냉철한 판단이 절실하다.

이 글을 쓰면서 빈 라덴과 오마르, 그리고 무고히 죽어간 많은 뉴욕 시민과 아프칸 국민들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E-mail: ew490@hanmail 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