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지방의 3·1운동 유적을 찾아서-1

'늙은 어머니 봉양을' 유언 남긴 채 왜경 총칼 속으로 뛰어든 어느 상인의 그 결연한 의지 잊지 말아야

2001-03-20     평택시민신문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12


김해규(한광여고 교사)


천주교인 주도, 권관리 기산리 주민 3월 9일 옥녀봉 횃불시위
4월1일 상가철시 평택역 광장 만세 운동 확산…항일운동 절정


■ 3·1절 기념식과 3.1운동

지난 3월 1일 평택 북부문예회관에서는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평택시와 최근 열기를 더해 가는 민세 안재홍 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자리였다. 이런 형태의 기념식은 최근 지방 자치단체들을 중심으로 많이 거행되고 있는데, 평택시에서도 작년부터 시작한 행사이다. 지방자치단체의 입장에서는 지역의 역사적 위상을 높이고 정체성을 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역사란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역사라고 말을 하는데, 3,1절 기념식이나 조상을 위하는 행위들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3.1절 기념행사에서 김선기 평택시장의 기념사는 주목할 만하였다. 우리가 원곡과 양성의 3.1운동이 대단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우리 평택지방에도 3월 9일부터 4월 중순까지 지속적으로 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반신반의했을지 모르지만 이 말은 사실이다.
평택지방의 3.1운동은 만세운동이 농촌지역으로 확산되기 전이었던 3월 9일부터 4월 중순까지 거의 전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된 운동이었다. 특히 4월 1일의 평택역 광장 만세운동은 수천의 군중이 주변 면 단위 지역의 호응을 받아가며 전개된 대규모 시위로, 평택 민중들의 항일투쟁의지를 세상에 널리 알린 쾌거였다.
3.1절을 하루 앞둔 2월 28일 나는 80여 년 전 평택지방에서 전개된 3.1운동의 역사적 현장을 답사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그 곳에는 왜놈들의 총 칼에서 나라를 되찾는 것만이 나도 살고 민족도 사는 길이라는 순수한 의지를 가졌던, 민중들의 피와 땀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3·1운동의 전개과정

3.1운동은 1차 세계대전 후 전후처리 과정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아 일어난 사건이었다. 처음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해외 유학생들이나 망명객들이었다. 그들은 강고한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으로 역부족이므로 외세의 힘을 빌려야 하는데, 마침 초강대국 미국이 독립의지가 있는 민족은 적극 지원하여 독립시켜 준다고 하는 말에 크게 자극받은 것이었다. 일본에서 재일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2.8독립선언이나 만주 간도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시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전개된 독립시위는 그와 같은 기대감 속에서 전개된 운동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오판이었다. 미국은 패전국인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식민지 분배문제로 강대국들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자, 만국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패전국의 식민지 해방을 지원한다는 것이었을 뿐 우리나라와 같은 승전국의 식민지 해방을 지원한다는 뜻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 지펴진 해방운동의 불길은 거셌다. 서울에서는 고종황제의 국상(國喪)일인 3월 1일을 거사일로 잡아 종교계 대표들과 민족주의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민족대표 33인이 선정되었다. 이들은 일제의 엄한 감시체제 아래서 시위가 크게 확산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또 바라지도 않았었다. 이들은 망국의 황제의 국상일에 시위를 벌이면 시위가 폭력화할 것을 염려하여 시위 장소인 탑골공원에 나가지 않고 태화관이라는 요리집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등 극히 몸을 사리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년, 학생들과 민중들은 달랐다. 그들은 사생결단하는 자세로 시위를 전개하였고, 운동의 지방 확산을 위하여 지방으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천안 옆의 병천에 내려와서 아우내장터 시위를 주도했던 16살의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시위운동이 지방으로 확대되는 과정에는 기독교(개신교)와 천도교의 역할이 컸다. 특히 개신교의 교단조직과 천도교의 지방교당은 초기 시위운동의 중심역할을 하였는데, 그 때문에 두 종교는 일제의 집중적인 박해를 받아야 했다. 평택과 가까운 화성군의 제암리 학살사건이나 우정면과 주변지역에서 자행된 천도교인들에 대한 학살과 탄압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 평택지방의 3.1운동

평택지역은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인데다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다른 농촌지역보다 이른 시기에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초기 평택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천도교인들이었다. 천도교(天道敎)는 19세기 후반 교조 최재우에 의해서 동학(東學)이라는 이름으로 창시된 민족종교로, 3.1운동 당시에는 3대 교주 손병희를 중심으로 이름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꾸고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단체였다. 평택에는 현덕면 권관리와 북면(진위면) 야막리에 다 수의 천도교인들이 살고있었는데, 최초의 시위는 현덕면 권관리와 기산리, 도대리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권관리의 천도교인들과 기산리, 도대리 주민들은 3월 9일 옥녀(玉女)봉에서 횃불을 올리며 시위를 벌였는데, 이 시위는 옥녀봉에서 동쪽으로 건너다 보이는 대안리의 마안산 시위와 덕목리의 고등산 시위 그리고 권관리의 계두봉(닭이머리) 시위를 촉발시켰다. 이와는 별도로 3월 10일 오성면 주민들도 숙성면 뒷산에서 만세시위를 하였으며, 같은 날 청북면 토진리 오봉산과 주변의 무성산, 현곡리 신포장터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평택에서는 3월 11일 평택장날을 이용하여 시위가 일어났다.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시위 소식을 전한 사람들은 고종의 국상(國喪)에 참여했던 안종각 등이었지만, 이 날의 시위를 주도한 인물들은 비전동(리)에 살았던 이도상과 목준상, 합정동(리)의 심헌섭, 고덕면 양교리의 한영수 등이었다. 이들은 초등교육을 받은 농촌지식인들로 이도상, 목준상의 경우 본정통 싸전거리에서 미곡상(米穀商)을 하던 상인들이었다. 특히 이도상은 이 날 시위에 참가하면서 친동생 이덕상에게, 만세시위에서 필시 자신이 체포될 것이므로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동생이 맡아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한 번 마음먹은 것을 다시 번복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이 날의 시위에는 수 천 군중이 모였는데 왜경은 총 칼로 진압하였으며, 주모자 14명이 체포되고 여러 명이 다쳤다. 체포된 14명 가운데 9명은 훈방되었고, 이도상 등 5명은 보안법 위반으로 송치되었가 실형을 받았다. 이들이 반일적인 정치사상범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보안법(保安法)에 의해 구속 수감된 것으로 볼 때, 이들은 3.1운동 이전에도 일경(日警)의 주목과 감시를 받았던 요주의 인물들로 보인다.
3월 21일에는 천도교인들이 많았던 북면(진위면) 야막리와 봉남리 주민 500여 명이 박창훈을 중심으로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면장(面長)을 강제로 앞세워 만세를 벌였다. 3월 31일에는 봉남리에서 박성백, 최구홍 등의 주도로 400여 명의 주민이 진위군청 앞과 경찰서 앞까지 진출하여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날 검거된 인물들 중 4명이 1년 6개월의 중형을 선고받았는데, 이와 같은 형량은 이날 시위의 격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3월 말경이 되면서 만세시위는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개항 이후부터 일제의 직접적인 수탈 대상이었던 농민들은 만세를 부르면 미국과 강대국들이 일제를 몰아내주고 나라를 되찾게 해준다는 말에 주저 없이 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 심지어 안성군 양성면의 경우처럼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는지 조차 몰랐던 농민들까지 시위에 참여하였다. 또 시위가 농촌지역까지 확산되면서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농민들은 평화적인 시위운동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눈앞에 보이는 일제 관원들과 경찰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평택과 가까운 원곡, 양성의 3.1운동이 대표적인데, 평택지방에서는 그와 같은 폭력적 시위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3월말에서 4월초로 넘어가면서 지역별로 산발적인 시위를 전개하던 평택지역의 만세시위가 평택을 중심으로 연대(連帶)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4월 1일에는 평택읍(시)의 상가들이 철시한 가운데 밤 9시를 전 후하여 평택역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 날 시위에는 평택 인근의 팽성읍, 고덕면, 오성면, 현덕면 등 주민들이 마을 뒷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며 서로 호응하며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양상은 면 단위 시위대들이 경부, 호남선이 관통하는 평택역을 중심으로 연대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같은 날 북면 은산리에서는 농민이었던 정재운, 정경순, 정문학 등이 자발적으로 마을 뒷산에 올라가 주민들을 선동하고, 군청 소재와 경찰 주재소가 있었던 봉남리까지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하였다. 또 4월 9일에는 고덕면, 북면, 읍내면, 오성면, 현덕면 등지의 주민들이 사전 밀약이 누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평택부근 1번 국도 변에서 대규모 만세시위를 전개하며 평택으로 행진하였다. 4월 10일에는 서탄면 금암리, 사리 수월암리에서 만세를 부르고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와 같이 시위의 규모가 커지고 폭력화하자 일제는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진압하였다. 결과 시위발생 지역마다 많은 사상자가 났으며, 마을마다 일경(日警)의 무차별 수색으로 피해가 속출하였다. 평택지방의 만세시위는 4월 10일을 고비로 수그러드는 양상을 보였으며, 이후 산발적인 시위는 있었으나 대규모 시위는 발생하지 않았다. <다음호에 계속>

<역사/문화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