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덕면 율포리서 어린시절 보내고 젊은 나이 무과급제한 지략 용맹 뛰어난 무장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22

김 해 규(한광여고 교사)


여진족 토벌 혁혁한 공로 …명분 약한 인조반정후 서인세력 모함으로 북상서 반란 일으켜
몸은 죽었어도 민중속 신하 전설로 다시 살아나…도일동 정골엔 병장기등 반란지원 유적도

이괄에 관한 몇 개의 전설

고덕면 여염리 성머리 마을 앞에는 삼성산이라고도 하고 투구봉이라고도 부르는 자그마한 산이 있다. 지금은 매일유업시범목장이 자리잡고 있어서 흔적도 희미한 이 산에는 이괄의 아버지 묘(墓)가 있다고 전해진다. 이괄은 잘 알다시피 조선 인조 때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옛부터 이 마을에는 이괄의 아버지 묘와 관련된 두 개의 전설이 전해온다.

첫 번째 전설은 이러하다. 이괄은 어려서 고덕면 율포리 방개울이라는 마을의 이진사 댁에서 심부름하는 아이로 있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이괄은 성실성과 충직함으로 이진사의 귀여움과 신뢰를 얻었다. 어느날 우연히 이진사의 방문 앞을 지나다가, 이진사가 지관(地官)과 은밀히 말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 내용인즉 성머리 앞산에 명당자리가 있는데 그 곳에 닭의 알을 묻으면 닭이 홰를 치며 울만큼 영험하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이괄은 이진사가 길을 나서기 전에 얼른 삶은 계란을 준비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길을 나서기 전 이진사는 이괄에게 계란을 준비하고 따라오라고 하였다. 이괄은 재빨리 삶은 계란을 준비하고는 이진사가 계란을 묻으라고 하는 곳에 삶은 계란을 묻었다. 날계란을 묻을 곳에 삶은 계란을 묻었으니 닭 울음소리가 날리 만무하였다. 이렇게 이진사 일행을 따돌리고는, 밤에 몰래 날계란을 준비해서는 명당자리에 가서 실험을 해 봤다. 그랬더니 정말로 닭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이곳이 명당임을 확신한 이괄은 나중에 아버지의 묘를 이곳에 쓰게 되었으며, 젊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출세가도를 달렸다고 한다.

두 번째 전설은 조금 다르다. 가난했던 이괄의 아버지는 명당자리를 구하여 자손이 영화롭게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이름 있는 지관을 불러 명당자리를 알아봤더니 성머리 투구산에 묘자리를 잡아주었다. 이 자리는 앞쪽으로 성머리 칼산과, 토진리 오봉산, 백봉리 백봉산이 솟아있어, 흡사 왕 앞에 3정승이 시립한 모양이었다. 왕후장상이 나올 명당자리로 확신한 이괄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곳에 자신을 묻어주도록 유언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괄은 어려서부터 부모 말을 거역하고 못된 행동을 일삼아서, 이괄의 아버지는 이괄이 자신의 유언대로 명당자리에 묻지 않을 것을 염려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는 반대로 유언하면 청개구리같은 이괄이 반대로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자신이 죽으면 시체를 거꾸로 묻어라"고 유언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자 이괄은 자신이 지금까지 부모 말을 거역하고 살았던 것을 크게 반성하고, 죽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시체를 거꾸로 묻어버렸다. 이 때문에 나중에 이괄은 무과에 급제하고 출세하였지만 결국 난을 일으키다 죽게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전설 외에도 여염리 임주마을 용우물에는, 이괄의 난이 실패한 뒤 나라에서는 이괄 아버지의 묘를 파묘하게 되었는데 묘에서 샘이 솟고 용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용의 다리가 매우 부실하기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용이 다리만 완전했으면 난(亂)이 성공하여 왕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며, 칠운동에는 난에 실패한 이괄이 숨어있었다는 이괄의 절터에 대한 전설이 전해온다. 이 전설들은 내용이 상반되지만 이괄이라는 인물에 대한 묘한 암시를 던져준다. 조선 후기 집권세력들이 줄 곳 강조했던 비열하고 치졸한 만고의 역적 이괄이 아닌, 민중들의 염원을 안고 시대변혁을 꿈꾸었던 인물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오늘 역사기행은 이와 같은 여운을 가슴에 담고 떠난다.

이괄은 어떤 사람인가

이괄(1587-1624)은 선조 20년에 출생하여 젊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지략과 용맹이 뛰어났으며, 무관이면서도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난 장군이었다. 이괄은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괄에 관한 기사가 많이 나오는데 대부분의 경우 여진족 토벌에 관한 것이며, 지략과 일 처리 솜씨가 뛰어나다는 것이다. 당시 상황은 여진족이 통일되어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를 압박하던 상황이어서, 부족단위로 흩어져 있던 이전의 상황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런 상황에서 여진족을 토벌했다는 것은 그의 지략과 용맹 그리고 국제사회의 변화를 판단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괄은 이와 같은 공적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그가 젊은 나이에 출세가도를 달리자 많은 사람들이 흠을 잡기 시작했다. 승승장구하면서 그의 마음에 교만함도 생겼다. 그러나 좌절은 관직생활에서 잠깐이었다. 몇 차례의 부침 끝에 광해군 14년에는 30대 중반의 나이로 서북면 지방을 방어하는 북병사에 제수되었다. 북병사는 종2품의 당상관이었다. 회사원들은 최고의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별(이사)을 다는 것이라고 하는데, 당상관은 조선시대 관료들의 꿈이었다. 그러나 이괄은 미적거리며 부임지에 가지 않았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못미더웠기 때문이다.

지극히 평탄했을 법한 이괄의 생애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인조반정이었다. 북병사 부임을 미루고 있던 이괄이 반정(反政)의 중심세력이었던 이귀의 권유로 반정에 참여하면서 그의 인생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반정(反政)에서 도성공격의 책임을 맡았고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반정이 성공한 뒤 그의 역할은 부각되지 않았다. 그는 반정의 주체였던 서인(西人)도 아니었고, 핵심중의 핵심이었던 공서파도 아니었다. 더구나 이괄은 반정의 주체세력이었으면서 비열한 행동을 하였던 김류와 다투었던 전력도 있었다. 그가 2등 공신에 책봉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이 일을 주도했던 공서파는 마음이 꺼림칙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이괄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반정 후 처음 제수받은 관직이 한성판윤(서울시장)이었던 것도 이괄에게 무력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북쪽 국경의 상황은 여진족 전문가인 이괄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으로 변하고 있었다. 서인들은 꺼림칙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를 서북면을 책임지는 부원수에 임명하였다. 이 순간부터 역사는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는 역적이었다?

서인주도의 인조반정은 명분도 약했고, 정당성도 없었다. 이들이 반정으로 넘어뜨린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황폐할 대로 황폐해진 나라를 재건하고, 명,청 교체기에 중립외교를 통하여 전쟁을 억제하는 등 성공적인 정치를 하고 있었다. 민중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인목대비를 위폐했다거나 영창대군을 죽인 일은 민중들이 문제삼을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배층의 권력다툼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반정(反政) 후 서인들은 정권 안보를 위한 지배이데올로기를 창출하였다. 박정희 정권이 반공이데올로기와 충효사상을 정권이데올로기로 삼은 것처럼, 서인들에게도 백성들의 눈과 귀를 호도할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화이론과 명분론을 바탕으로 친명배청을 주장하는 것이었고, 성리학의 예학을 바탕으로 양반중심의 신분질서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괄의 난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어났다.

부원수로 북쪽 국경을 책임진 이괄은 임무에 충실하였다. 그는 명, 청 교체기의 위기상황을 직시하며 성책을 수리하고 군대를 조련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런 그에게 사헌부, 사간원에서 모함을 하였지만 그의 충성심을 알고 있는 왕에 의해 무마되었다. 그러나 이괄을 보는 공서파의 의심은 날로 커져만 갔다. 드디어 공서파의 사주를 받은 허통, 이우 등의 고변을 계기로 이괄 휘하의 장수들을 압송하기 위해 금부도사가 파견되었다. 사태는 이괄을 죽음 쪽으로 몰아갔다. 이제 잡혀가서 개죽음을 당하느냐, 아니면 죽이려는 세력들을 몰아내느냐의 선택만 남게 되었다. 선택이 기로에서 이괄은 반란을 택하였다.

이괄은 아들 전(銓)과 부하장수 한명련을 압송하던 금부도사 일행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이 일어나자 관서지방의 민심이 이괄에게 크게 호응하였다. 이괄의 군대가 남하하면서 반란군에 대한 호응은 평택에서도 있었다. 평택시 도일동 정골에는 제철유적이 있는데, 이 유적은 원만주라는 이 마을의 토호가 주변 72개 성씨들의 도움을 받아 병장기를 만들고 농기구를 만들어 팔아 군자금을 마련했던 장소라고 한다. 반란군은 유리한 민심을 등에 업고 연승을 거두며 한양을 점령하였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집권세력은 이괄, 한명련의 가족과 친척을 처형하고 왕과 함께 공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반란군은 어디까지나 반란군에 불과하였다. 전열을 정비한 관군은 도원수 장만의 지휘 하에 남하하는 이괄 군을 경기도 광주부근의 길마재에서 대패시켰다. 이괄, 한명련은 100여 군졸만 이끌고 이천까지 도망하였지만 부하였던 기익헌, 이수백에게 목이 잘려 왕에게 바쳐졌다. 난이 진압된 후에도 집권세력은 이괄과 관련 있는 사람들을 색출하기에 혈안이 되었고 발각되면 무참히 처벌하였다.

그러나 국가권력이 민중들의 가슴까지 색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건이 민중들의 정서와 부합되느냐를 알려면 사건이 끝난 후 민심의 동태를 살피면 알 수 있다. 민심은 처음부터 반정세력의 편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괄이 부조리한 정권을 타도하고 새 세상을 열어주기를 원했다. 임꺽정이나 홍경래 난이 실패한 후 그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소문이 사실처럼 퍼졌듣이, 민중들은 이괄의 죽음을 믿으려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믿음은 신앙이 되고 설화와 전설이 되어 부활하였다. 내용은 상반되지만 여염리의 이괄 아버지 무덤에 관한 전설이나 임주마을의 용우물 전설이 만들어진 것도 민중들의 기대와 아쉬움의 반영일 것이다.

이괄은 분명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는 그저 문무에 뛰어난 장수였을 뿐이다. 체제를 전복하고 싶은 욕구나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반란도 그의 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민중들은 그의 봉기를 반겼고, 그에게 희망을 걸었다. 민중들은 이괄에게서 천심을 거스르는 집권세력을 속 시원히 물리쳐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역사/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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