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재 명창 이 동 백의 판소리 인생

경기·충청지역의 판소리 중고제 명창 이동백선생은 1866년에 태어나 1950년 84세로 생을 마감했다. 명창중 최고 벼슬에 올랐었고 맑고 깨끗한 미성, 풍부한 너름새, 거칠데 없는 이목구비와 온화한 인품 등 광대로서 타고난 풍채로 조선소리의 사양길에서 창극의 새로운 활로로 판소리를 이끌어냈다. 즉흥성이 빼어난 소리꾼으로서 공연현장의 상황에 따라 사설과 곡조를 바꾸어 불러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부를 때마다 달리 불러 제자들이 따라 부를 수 없었고 그것이 한 제자도 남기지 못한 요인 중 하나가 된다.
중고제는 동편제·서편제와 함께 판소리 3대 유파의 하나로서 충청·경기·강원 일원의 사회적, 감상적 바탕을 흡수해서 형성된 특색을 지닌 것으로 1930년 전후만 해도 송만갑, 박녹주, 정정열 등은 물론 이동백, 김창용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중고제는 두 갈래의 계보로 전승되어 왔는데 그 중 하나는 충청권을 중심으로 김성옥·김정근·황호통에서 김창룡과 동생 김창진에서 박동진으로 이어지고 있고, 황호통에서 다시 이동백·공기남·강장원으로 이어지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경기권을 중심으로 염계달·고수관·한송학·김석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동백선생은 1866년 2월3일 충남 서천군 비인면 도만리에서 출생하였고 본명은 종기이며 동백은 어릴 때 부르던 이름이다. 선생은 먼저 초암에서 살았던 율객 이규석을 스승으로 섬겨 사설을 배운 다음 산과 들을 찾아다니며 독학하였고, 그후 중고제 명창인 김정근의 문하에서 소리 공부를 하다가 전북 순창의 동편제 명창 김세종의 문하로 옮겨 수년 동안 도야했으며, 담양 출신이자 서편제 시조 박유전의 제자인 이날치로부터 소리를 익혔고 이날치의 새타령은 훗날 이동백의 더름으로 발전 계승 되었다.

26세에 창원부사 앞에서 새타령을 불러 단번에 명창에 오르게 되었고, 1902년 원각사 시절에 송만갑, 김창환 등과 창극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고종 황제의 탄신축하연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는 절창으로 판소리의 진수를 보여 소리에 감동한 고종은 그에게 정3품 통정대부라는 벼슬을 하사했다. 그래서 이통성이라고도 불렸다고 전한다.

1933년에는 송만갑·정정열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만들었고, 민족소리 수호와 판소리 현대화를 위한 창극발전에 애쓰고 후진 양성과 중고제의 맥을 이으려고 노력했다. '조선성악연구회'의 지도자인 김창룡, 정정열, 송만갑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이동백은 일선에서 물러 앉고자 조선일보사 주최로 「이동백 은퇴 기념연주회」를 경성 부민관에서 1939년 3월 29일∼30일 이틀간 공연을 가졌다.

은퇴후 경기도 평택시 송탄면(칠원2리:새말)에 내려와 여생을 보냈으며, 해방 후에도 간간이 초청무대에 섰다. 선생은 죽기 직전까지 날마다 북통을 지고 산에 올라가서 소리를 했으며, 죽기 직전에는 겨우 소리를 알만하니 죽을 때가 되었다고 탄식했다 한다. 1950년 별세한 후 칠원2리에서 원곡쪽으로 보이는 야산에 묻혔다고 전한다.

이동백선생의 소리의 특징은 우조를 바탕으로 한 단아함과 즉흥성이 뛰어났고, 상황에 따라 사설과 곡조를 맞춰 부르는 감각은 거의 독보적이었으며, 명창으로서 가장 장수한 한 사람이면서 심청가·적벽가에 장하였고 새타령은 이날치선생 이후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오직 섭섭한 것은 이동백선생의 제자인 강정원 면창이 대를 잇지 못하고 병사하면서 이동백선생의 창제는 그것으로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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