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대규모 국영목장이 있었다는 증거물들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21
김 해 규(한광여고 교사)



1.석정리 장성(長城)에 대해 가졌던 의문들

지난 1년 반 동안 나는 평택지방의 관방유적(關防遺蹟)과 함께 살았다. 나의 관심과는 한걸음 떨어져있다고 생각했던 관방유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평택시사 편찬에서 우리고장의 관방유적에 대한 집필을 의뢰받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평택지방의 관방유적을 두루 답사하고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독자들은 믿지 않겠지만 이번 조사에서 내가 확인한 바로는 평택지방에 무려 20개가 넘는 성곽유적과 2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그 중에서 포승면 석정리의 장성(長城)은 많은 의문을 던져주었다. 이 성곽은 쌓은 시기도, 쌓은 목적도, 쌓은 사람도 전혀 알려진 것이 없었으며, 현재까지 밝혀진 길이만도 3.5km나 되는 긴 성(城)이었고, 일반적인 성곽처럼 타원형이나 장방형으로 쌓지 않고 횡으로 길게 쌓았기 때문이다. 평택시에서 편찬된 각종 문헌에서도 실체를 소상히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때 나는 성(城)의 형태 때문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려말에 쌓은 성곽으로 속단한 적도 있었다.
장성(長城)에 대한 의문은 나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포승면의 마을들을 조사하면서 느낀 바로는, 주민들의 궁금증은 나보다 더하다는 것을 알았다. 모호한 것에 대한 궁금증은 민중들의 상상 속에서 신화나 전설을 낳는다. 지난 2월 포승면 만호리 원터 마을에서 만난 황씨 할아버지는 "황장군의 전설"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 내용이 황당하면서도 한편 으로는 수긍이 가는 내용이었다. 이 분에 의하면 황장군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무예를 지닌 분이었는데, 얼마나 빠르고 용맹한지 만호리 집에서 밥을 얹혀놓으면 밥이 다 되기 전에 원정리(포승면) 멍거니 산까지 말을 달려 풋고추를 따다가 밥을 먹을 정도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분은 석정리 장성(長城)은 황장군이 하룻밤 사이에 신통력을 부려 쌓았는데 자신은 그분의 후손이라고 하며 무척 자랑스러워하였다. 그러나 황장군의 전설은 장성(長城)의 궁금증을 완전히 풀어주기에는 보태진 내용이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한, 두 가지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는데, 장성은 황장군이거나 다른 장수들이 아닐지라도 무관직에 있던 어떤 관리가 주민들을 동원하여 급하게 성(城)을 축조했다는 것은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풀리지 않는 것은 왜, 어떤 목적으로 성곽을 축조했느냐는 것이었다.

2.홍원리의 마장(馬場)이라는 마을이름

장성(長城)의 축성시기와 용도는 나에게도 미지수였다. 그래서 나도 한 때 고려시대 용성지역에 출몰했던 왜구들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속단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홍원리의 마장(馬場)이라는 마을 이름을 알게 되면서, 군사적 목적보다는 이 지역에 있었던 목장(牧場)과 관련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의문을 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대동지지, 대동여지도와 같은 지도나 지리지들을 뒤졌다. 홍원리는 고려시대에 포내미 부곡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수원부에 속하였기 때문에, 수원부와 관련된 자료들을 살펴야 한다. 그러다가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증 동국여지승람을 보던 중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지금의 화성군의 양야곶, 풍도와 함께 홍원곶에 목장(牧場)이 있다는 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이 목장은 후대에 홍원곶장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었으며, 목장을 관리하는 감목관(監牧官)을 파견하였다는 기록도 있었다. 이와 같은 기록은 19세기 기록물인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와 같은 다른 지리지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이 목장은 조선전기에서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그랬지만 조선시대 들어 경기도 지역에는 마장(馬場)이 많이 설치되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4년의 기록에도 "경기지방에 묵혀있는 넓은 땅은 권세 있는 사람들이 차지하거나 말목장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나무하러 갈 수도 없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고지도와 다른 기록에 의하면 홍원마장은 대단히 규모가 컸던 마장(馬場)이었다. 이 마장은 포승면 원정리 마장과 함께 국영목장이었다. 국영 마장에는 감목관이라는 관리가 파견되었고, 주변마을 주민들은 목부(牧夫)로서 마장에서 부역을 담당해야 했다. 홍원마장에는 말 외에도 소가 사육되었다. 말은 군마용, 하마용 등으로 사용되었고, 소는 궁궐이나 중요관청의 식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옛 성터와 새 성터

지난겨울 효명종고의 장연환 선생과 홍원리 답사를 하였다. 이번 답사는 석정리, 홍원리의 마장유적도 살피고 최근 새로 건설된 장안교를 보고싶었기 때문이다. 석정리 장성(長城)은, 현재 석정리 감기마을에서 성해리 해조마을까지 남아있었다. 우리는 먼저 장성이 시작되는 해조마을에 들어갔다. 해조마을은 학현리 사이에 형성된 넓다란 성해리 들판을 앞에 두고 있다. 성해리 들판은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들어왔던 갯벌이었다. 그래서 주변의 자연마을 이름들도 해조(海潮), 용소(龍沼)와 같이 바다와 관련된 이름이 많다. 성해리 용소동에서 인터뷰에 응한 할아버지(68세)에 의하면, 해조마을 앞 갯벌은 해방 전에 이강태란 분이 빈민들을 동원하여 간척을 시도했는데 실패했고, 해방 후 황해도 등에서 월남한 피난민들이 정부지원을 받아 성공했다고 하였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는 차가운 냉기만 돌고 배고픈 참새들만 이리저리 날고 있었다.
장성(長城)은 해조마을회관 앞에서 시작하여 석정리 감기마을 쪽으로 길게 이어졌다. 본래 큰 성(城)이 있으면 주변에 성곽과 관련된 지명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장성(長城)도 성벽을 중심으로 해조마을 건너편 마을을 성밖(성외)이라고 불렀는데, 성해리라는 이름도 성외와 해조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었다. 옛 지도에 나타난 지형을 볼 때 이 지역은 석정리와 해조마을을 경계로 반도로 돌출된 지형이다. 이와 같은 지형은 목장으로서 입지조건이 최상이라고 할 만 하다. 특히 지리적으로 한양이나 개경과 가까운데다 바다와 인접해서 도성(都城)까지 운송하는데도 편리한 조건을 갖추었다. 하지만 내륙과 연결된 남쪽방향이 문제였다. 장성(長城)의 축조는 마장(馬場)운영에 있어서 남쪽방향의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한 조처였을 것이다.
해조마을에서 나와 마장마을에 갔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원마을에 산다고 자신을 소개하신 할아버지(71세)는 장성(長城)외에 옛 성(城)이 있었음을 말해주었다. 이분의 말로는 현재의 장성(長城)을 쌓기 전에 옛 성(城)이 있었는데, 그곳이 성문앞 마을 뒤족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조상 중에 이파원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목장의 관리자였으며 새원에 살았다고 말했다. 이분과의 인터뷰는 목장의 위치나 시대추정에 많은 단서를 주었다. 이 분의 말대로 추정하면, 목장(牧場)이 있던 곳은 마장마을이 분명하였고, 옛 성(城)과 새 성(城)은 목장의 말이나 소들이 내륙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는 조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 감목관은 원(院)이라는 지명으로 볼 때, 옛 성(城)이 있을 때는 외원마을에 거주하다가 장성(長城)이 축조되면서 새원마을에 상주하였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4.마장(馬場)에 살던 사람들

마장마을은 목장(牧場)으로의 조건이 상당히 좋았다. 약 15도 정도의 경사면에 어머니의 자궁같이 포근히 감싸인 마을 모양이 문외한인 나의 눈에도 천혜의 목장지라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조사를 하다보니 홍원리 주변에서 100년이 넘는 마을은 마장, 새원 뿐이었다. 이 마을들도 조선 후기에는 10호에서 20호 내외의 작은 마을이었다. 마장(馬場) 주위의 마을백성들은 목부(牧夫)로서 부역을 해야만 했다. 목부(牧夫)는 신분은 양인(良人)이었지만 천한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았다. 이들은 마장(馬場)의 관리 뿐 아니라 배로 말을 운송하는 일까지 담당했는데, 이 일이 무척 고되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부역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몰래 도망가거나, 심지어 바다에 빠져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 초부터는 목부(牧夫)들을 3년마다 조사하게 하여 적(籍)에 올리고 특별 관리하는 조처를 취했다.
홍원리 마장(馬場)주변의 마을들에 큰 변화가 나타난 것은 구한말 목장이 폐지되면서였다. 목장의 폐지는 부역에서 해방을 의미했다. 6.25 전쟁 후에는 황해도 연백사람들이 외원마을과 용소마을 등에 정착하였는데, 정부는 이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성해리 뜰을 개간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노동력이라야 빈 몸뚱이 뿐이어서 개간사업은 한마디로 사람잡는 일이었다. 그렇게 만든 농토를 일구어 피난민들은 목숨을 유지하고 자식들을 기르고 가르쳤다. 생존이 주요한 과제였던 이들에게 희망의 빛이 비친 것은 70년대 남양만 방조제 건설이었다. 남양만 방조제는 그동안 갯벌로 남아있던 성해리 뜰의 대부분과 이웃의 석정리의 감기, 현곡마을 앞 갯벌을 옥토로 변모시켰다. 마을 앞에는 전쟁 후 힘들게 개간했던 땅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의 넓다란 농토가 펼쳐졌다. 이 땅들 때문에 외지인들도 들어왔지만, 현지인들은 큰 혜택을 보았다. 특히 바닷가에 농토가 있어서 수시로 염해(鹽害)에 시달렸던 논들은, 이제 물 걱정, 염해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팽성지역이나 오성면, 현덕면처럼 3공화국시절 방조제 건설로 살기가 좋아진 지역의 마을주민들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지나칠 만큼 컸다. 그만큼 그들에게 있어서 가난과 배고픔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친일장교였고 독재자였다"라고 공박하는 것이 공허하게 여겨졌다.

<역사/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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