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일동~진위면 봉남리 길은 한양과 삼남 잇는 삼남대로 주요 길목

평택의 역사와 문화 기행 - 20

김 해 규 (한광여고 교사)

평택호물줄기탐사에 참가해서


평택의 옛 길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언젠가는 내 두발로 걸어서 답사하고 싶은 생각을 가졌었다. 옛 길을 걷는 일도 즐겁겠지만, 길을 걸으면 오랜 세월 베어있는 사람들의 숨결과 삶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마침 평택 참여연대가 주최하는 "2001년 평택호물줄기탐사" 준비위에서 나에게 행사기간 중에 평택지방 향토기행을 해보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래서 이참에 그동안 맘먹고 있던 삼남대로의 도보답사를 계획하게 되었다. 이 계획에는 참여연대의 이은우 사무국장도 찬성했고, 김승민 부장도 대 찬성을 하여서 일사천리로 준비가 진행되었다. 답사 며칠 전에는 간단한 자료집과 프로그램도 정하고, 답사코스에 대한 사전 조사와 답사도 세 번쯤 하였다.

지난 7월 28일 아침 집결장소인 평택초등학교에 갔더니 이은우 사무국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주최측에서는 참가한 사람들을 생태기행팀과 역사기행팀으로 나누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생태기행팀은 나하고 같은 재단에 근무하고 계시는 김만제 선생님이 맡으셨다. 주최측의 배려로 역사기행팀에는 초등학생 고학년과 중, 고등학생을 중심으로 팀이 꾸려졌다. 도보기행이라는 소리를 듣고 초등학생 저학년과 엄마들이 자발적으로 생태기행 팀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최종 인원을 점검해 봤더니 우리 팀은 황재순 공동대표와 자원봉사자를 포함하여 24명이었다. 이만하면 딱 좋겠다 싶어 얼른 버스에 올랐다.

춘향이 길을 걷다

우리는 답사의 출발을 도일동 원균장군 묘에서 시작하기로 하였다. 땀흘리기 싫어하고, 고생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들에게 원균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몸과 마음에 새로운 기(氣)를 넣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원균 장군 묘에서 이번 답사의 일정과 원릉군 원균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나의 이야기는 원균의 업적에 대한 설명보다, 왜 우리에게 향토사, 향토인물이 중요한가, 우리가 오늘 뙤약볕을 걸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강연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심드렁하다. 몇 몇 아이들은 벌써부터 지친 표정이었고, 대부분 설렘보다는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앞으로 약 10km를 걷는다는 나의 설명에 한광여중에 다닌다는 한 여학생은 차라리 버스로 돌아가겠다고 돌아선다. 순간 관심과 열정이 없는 불특정 다수를 데리고 삼복더위에 도보답사를 하는 것이 무모하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나의 열정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답사 길은 일명 춘향이 길이라고 하는 삼남대로(三南大路)이다. 삼남대로 중에서도 우리는 평택시 도일동에서 진위면 봉남리 봉남교까지 약 10km 구간을 계획하였다. 길을 가면서 초등학생들보다 중학생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차량들이 고속으로 달리는 큰길에서 아이들에게 줄을 맞춰 걷자고 해도 듣지를 않는다. 그래도 아이들을 달래가며 한발한발 걸었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아이들은 이제 얼마나 남았느냐고 아우성이다. 더위에 지친 아이들에게 이몽룡과 춘향이 이야기라든가 맹정승 이야기를 꺼내기가 무서웠다. 흰치고개에서는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마땅한 그늘조차 없다. 길가에 멋지게 지은 카페가 있어서 교차로 저널의 이철형 기자와 같이 주인께 사정을 이야기하고 마당에 있는 간이 탁자에서 식사만 잠깐 하자고 부탁했더니, 마당 한 구석에 오랫동안 쓰지 않고 버려 둔 탁자를 가리키며 저곳에서 먹고 가라고 한다. 몰인정한 주인의 태도에 화도 나고 자존심도 상해서, 차라리 길가에서 먹자고 아이들을 다리 밑으로 데리고 갔다. 점심을 먹였더니 부쩍 생기가 도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길을 나섰다. 덕분에 흰치고개 아래 백현원 터에서는 맹정승과 이도령 이야기도 할 수 있었고, 나머지 길도 비교적 수월하게 갈 수 있었다. 송북동 소골 앞에서 산길로 접어들어 한 고개를 넘었더니 산 아래가 오룡동이다. 이 곳에서 봉남교는 지척이다. 오룡동을 지나 샛뚝거리를 걷는데 들판에서 훈풍이 분다.

춘향이 길에 대한 몇 가지 의문들

옛 길에는 사람들의 삶과 숨결과 애환이 서려있다. 답사의 시작점인 도일동 원도일 마을 앞길은 한양에서 삼남으로 내려가는 삼남대로와, 서쪽으로는 송탄의 장안동, 동쪽으로는 원곡의 가천역으로 가는 길이 좌우로 갈리는 교차로였다. 교차로는 교통의 요지일 수밖에 없는데, 이 곳에도 나그네에게 밥과 술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주막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곳을 "감주거리"라고 불렀다. 주막거리는 도일동 초입, 지금은 평택특수전문대학이 들어서고 삼남대로 확포장 공사가 진행중인 곳에도 있었다. 이 길로 접어드는 삼거리에는 엄나무가 한쪽 가지가 잘린 체 도로 가운데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이 나무가 도일동의 성황목이다. 성황목 옆에는 성황당이 있었고, 사람들은 이 곳을 지나며 여행길의 안전을 기원하며 돌을 하나씩 던졌다. 도일동 하리 마을 논둑에서 만난 노인에게 성황당 이야기를 하였더니 "옛날에는 다 그랬잖남"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원도일 마을 주막이 충청도로 넘어가거나 장안동을 거쳐 청북이나 포승방면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면, 하리마을 부근의 주막은 날이 저물어 흰치고개를 넘기 어려운 사람들이 쉬어 가는 곳이었을 것이다. 주막거리를 지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힐 때가 되면 흰치고개를 넘는다. 흰치고개는 지금 삼남대로 확포장공사로 고개의 절반이 잘려나가 한층 나지막하게 보이지만, 큰산이 없는 평택지방에서는 산림이 울창하고 쉬 넘기 힘든 큰 고개였다.

흰치고개 너머 첫 동네가 동막이다. "동막"이라는 지명은 전국에 200개가 넘는다. 송탄시사에는 "동쪽 끝에 있는 마을로 동쪽으로 산이 막을 친 것처럼 둘러싸여서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되어있지만 그다지 신뢰감을 주지 않는다. 그보다는 "마포 동막"처럼, 마을 앞에 주막이 있어서 주막의 동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막과 소골로 내려가는 삼거리에는 조선 전기 백현원이라는 원(院)이 있었다. 백현원 자리는 "주막거리"로 불리는데, 지금은 춘하추동이라는 식당이 들어서 있다. 옛 주막자리에 식당이라, 제법 그럴듯하다. 주인이 삼남대로의 역사를 알았더라면, 식당이름이 춘하추동보다는 "백현원"이나 "삼남대로" 또는 "춘향식당"으로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원(驛院)제도가 정비된 것은 조선 세종 때지만, 상당수의 원(院)들은 조선 전기 이후 제 기능을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백현원도 조선 전기 이후 거의 폐지되다시피 했으며, 양난(兩難) 이후에는 원(院)이 있던 곳에 주막이 들어섰다. 조선 전기 백현원의 존재를 알려주는 옛 이야기가 맹정승(고불 맹사성, 조선 세종때의 명 재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평택군지(1984)나 송탄시사(1994) 등에 보면, 맹사성의 유명한 "공당문답"이 백현원에서 만들어졌으며, 맹정승에 의해 백현원에서 마산리 오룡동으로 넘어가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춘향전에는 백현원에 관한 이야기가 빠져있다. 대신 암행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남원에서 춘향이를 데리고 삼남대로를 따라 올라오다가 옛 백현원 자리의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었다는 이야기가 평택지방에 전설처럼 전해온다. 또 19세기 말에 편찬된 진위현지에도 백현원 터에 우곡점이라는 점막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한층 신빙성을 더해준다.

본래 삼남대로는 백현원을 지나 동막 입구 산기슭을 끼고 마산리 숲안말(수촌)로 넘어갔다. 이 길은 그동안 나에게 미궁(迷宮)이었다. 백현원에서 진위방면으로 넘어가는 길은 워낙 여러 갈래여서 정확히 어느 길이 대로(大路)가 지나는 길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번 도보답사를 준비하면서 동막과 숲안말, 오룡동, 오리골을 사전 답사하는 가운데 그동안 품었던 의문들이 풀리게 되었다. 숲안말에 갔더니 봉남목교가 있었던 봉남교는 마을 앞 샛뚝거리 지나 바로 지척에 있었다. 숲안말에서 만난 마을 노인도 이 길이 춘향이 길이라고 하면서, 송북초등학교가 생기기 전 만해도 산너머 동막 아이들이 이 길을 넘어 봉남초등학교에 다녔었노라고 말해주었다. 순간 가슴에 맺혔던 체증이 쑥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미궁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삼남대로가 풀숲에 묻힌 까닥

삼남대로 뿐 아니라 조선시대 대부분의 도로들은 지금도 건재하다. 일제강점기의 신작로가 대로(大路)를 따라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삼남대로 평택구간만은 신작로 건설과정에서 제외되어 풀숲에 묻혔다. 그 이유가 뭘까?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나는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첫째, 일제강점기에 대규모 개간과 간척사업이 있었는데, 이 시기를 거치면서 그동안 황무지로 버려졌던 땅들이 농토로 바뀌었고 하천 주위 저지대가 개발되었다. 그러다 보니 빠른 시간 안에 도달하기 위해 가급적 최단거리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평택지방의 옛 길들은 신작로 건설에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경부선 철도가 옛 읍치(邑治)들과는 관련이 적은 병남면 평택리와 탄현(송탄)면을 지나가게 되면서 신작로도 철도와 연관되어 건설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는, 일제강점기 일본인과 일본인의 농장이 많았던 평택지방의 사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1910년을 전후하여 일제는 조선의 상당량의 토지를 빼앗아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일본인 이주자들에게 싼값으로 불하하였는데, 이 토지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역둔토(驛屯土)라든가 궁토(宮土), 또는 철도수용지와 같은 국가나 관청의 소유토지였다. 평택지방에는 유난히 궁(宮)자가 붙은 지명이 많은데, 이 마을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궁토(宮土)라든가 역둔토(驛屯土)가 있었던 마을들이다. 일제강점기 이 마을들에는 상당수의 일본인 농장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 할 때 신작로와 철도건설은 일본인 농장의 양곡수출과 관련되어 건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택역이 행정구역의 중심인 진위면 봉남리 부근이나 팽성읍 객사리에 세워지지 않고, 특별한 이유도 없이 허허벌판이었던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에 세워지게 된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새로운 길이 뚫리고 사람과 물자가 그곳으로 유통되면 자연스럽게 옛 길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옛 길에 남겨진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마저 사라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서운한 일이다. 최근 평택시는 도일동에서 동령까지 삼남대로 확포장 공사를 추진하고 있고, 조만간 진위까지 확장할 것이라고 한다. 경제적 가치보다는 역사나 문화적 가치를 먼저 생각하고 추진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한심하기 그지없다. 이왕 경제적 가치를 상실한 길이라면 문경새재의 경우처럼 문화적 가치를 되살리는 차원에서, 산책로나 자전거 도로 등으로 개발하여 옛 정취를 되살리고, 춘향이 길, 맹정승 길, 감주거리, 주막거리, 옛 백현원 터와 같은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놓아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 본다. 결국 문화의식 수준의 문제이다.

<역사/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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