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위면 은산리는 봉화 정씨 마을… 정도전 직계 후손들 모여 살아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 - 19

김 해 규 (한광여고 교사)

그의 정치철학은 '민심은 천심' 뜻 지닌 민본사상 그리고 신권정치(臣權政治)
문헌사엔 삼봉집 목판본 보관…시,정치론, 요동정벌 병법 등 광범한내용이…



봉화 정씨가 6백년을 살아온 마을 은산리

진위면 은산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마을이다. 버스도 별로 없는 데다, 송탄에서 버스를 타고서도 한참을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은 원곡면 지문리에서 성은리 방향으로 도로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서 자동차로 가기가 제법 수월해졌다. 더구나 지문리 상지저수지 주변은 최근 몇 년 동안 카페와 식당이 들어서서 가족이나 연인들이 오붓한 여행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가 되었다. 내가 은산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3년 전 진위면지를 편찬하면서였다. 이 책은 진위면의 역사, 지리, 문물, 인물, 민속 등을 다루는 책이어서, 은산리의 봉화 정씨 마을과 정도전의 사당인 문헌사를 자주 답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은산리는 기동, 방촌, 미동, 상리, 월경동 등 모두 5개의 마을로 형성되었다. 이 가운데 봉화 정씨의 동족 마을은 기동, 방촌, 상리이다. 은산리 봉화 정씨는 모두 문헌공파로 삼봉 정도전의 직계 후손들이다. 봉화 정씨가 이 마을에 입향(入鄕)한 시기는 대략 600년쯤 된다. 입향조는 용인 현감 등을 지냈던 정래(鄭來)라는 분으로, 이 분이 처음 터를 잡은 곳이 은산리 기동마을이다. 기동마을은 본래 이름이 텃골로, 처음으로 터를 잡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봉화 정씨는 마을과 지역사회에 확실하게 뿌리를 내린 후 16세기부터는 관직으로의 진출을 꾀하는 한편, 주변지역으로의 확대를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생긴 마을이 방촌과 말미라고도 부르는 상리(上里)이다. 이와 같은 배경 때문에 지금도 종가댁(宗家)과 사당인 문헌사는 기동마을에 있게 되었고, 소 종가 댁은 방촌마을에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답사활동에서 열정 있고 심성이 온후한 분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은산리 답사에서는 정도전의 18대 손인 정종봉 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 분이 아니었으면 봉화 정씨의 종가 댁을 방문하는 일하며, 사당을 답사하는 일, 그리고 소 종가 댁에 전해오는 각종 문헌들을 살펴보는 일, 진위향교의 문헌자료를 이용하는 일들을 수월하게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고두고 감사해야 할 일인데 아직까지 감사의 마음을 전하지 못해 죄송하다.

삼봉 정도전과 문헌사

삼봉집 목판본을 이야기하기 전에 정도전과 그의 사당인 문헌사에 대하여 먼저 이야기해야겠다. 정도전(1342-1498)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는데 가장 공(功)이 컸던 인물이다. 이성계가 조선왕조 건국에 군사적 역할을 담당했다면, 정도전은 사상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정도전은 평소 이성계와 자신의 관계를 한(漢)나라의 장량과 고조 유방과의 관계로 묘사하였다고 한다. 한 번은 취중에 말하기를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고조를 이용하여 자신의 뜻을 폈듯이, 자신과 이성계와의 관계도 그러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이라는 나라의 설계도는 정도전의 작품이었다. 그는 "조선(朝鮮)"이라는 국호(國號)를 정하는 일에서부터 궁궐(宮闕)의 위치와 이름, 4대문(大門)과 소문(小門)의 명칭, 도성 안의 건물의 배치와 지명들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 그 뿐인가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 등을 저술하여 조선왕조의 체계와 법제를 세우고 사상적 기반을 구축했으며, 고려국사를 저술하여 고려시대를 정리하고 조선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이처럼 많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정도전은 역성혁명 때문에 요동정벌이 좌절된 것을 크게 아쉬워했다. 그래서 조선이 건국된 후 요동정벌에 대한 꿈을 키웠는데, 이와 같은 그의 꿈이 담겨 있는 책이 "진도(陳道)"라는 병법서이다.

연세대학교의 최정호 교수는 정도전의 정치철학을 첫째가 민본사상(民本思想)이고, 둘째가 재상중심의 신권정치(臣權政治)이며, 셋째가 언론정치(言論政治)라고 갈파하였다. 정도전은 "왕은 민심(民心)을 얻은 사람만이 천명(天命)을 받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통치자가 민심을 잃으면 천명(天命)이 덕(德) 있는 통치자에게로 옮겨가는 데 이것이 혁명이라고 주장하였다. 달리 말하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임금의 하늘이다"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는 재상중심의 정치를 역설하면서 "임금의 역할은 한 사람의 재상을 선택하는데 있으며, 훌륭한 재상을 얻으면 중간 정도의 자질이 있는 임금도 정치를 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정치에서는 언관(言官)이 역할을 잘해야 정치가 바로 선다고 하면서, 임금은 항상 바른 직언을 할 수 있는 언관(言官)들을 곁에 두고 그들의 지적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로 앞서가는 정치 사상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적 민본정치를 지향하고 재상권과 언론의 기능을 바탕으로 신권우위의 정치를 지향하는 정도전의 정치사상은 조선의 통치체제에 대부분 반영되었다. 그는 자신의 신권정치의 이상(理想)이 후대에도 계승되게 하기 위하여 태조의 후계를 정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에 공(功)이 컸고 강력한 왕권을 희망하는 이방원 보다는, 배다른 형제 방석을 세자로 책봉토록 하였다. 능력이 조금 부족한 왕일지라도 훌륭한 재상을 곁에 두면 문제될게 없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태도는 하륜, 권근, 변계량 등 구신(舊臣)들을 배경으로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亂)으로 힘없이 좌절되고 말았다. 정도전은 건국에 공(功)이 가장 컸음에도 불구하고 왕자와 종친을 모해하였다는 죄명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역성혁명의 절반의 실패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정도전이 죽은 후 그의 사상은 점차 묻혀갔고, 후손들의 입지는 좁아졌다. 신원(伸寃)회복도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심지어 광해군 시기 홍길동의 저자 허균이 죄인으로 잡혀갔을 때 정도전의 사상을 탐독한 것이 죄명으로 거론될 정도였다. 은산리 봉화 정씨의 입향조(入鄕祖)였던 정래가 산간벽지인 기동마을에 터를 잡은 것도 이와 같은 배경이 작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사상이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의 정조 때이며, 신원이 회복된 것은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에 의해서였다. 집권한 대원군은 정도전의 공훈(功勳)과 지위를 회복하도록 명하였으며, 문헌공(文獻功)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공적을 기렸다. 신원이 회복되면서 1872년(고종 9년)에는 은산리에 이웃한 산하리에 사당이 건립되었으며, 왕명에 의해 주위 7개 고을의 수령들이 제(祭)를 올렸고, 왕은 치제문(제사를 지내는 글)을 하사하여 정도전의 업적과 덕망을 기렸다.

삼봉집 목판본

기동마을 정도전의 사당 문헌사에는 삼봉집(三峰集)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다. 모두 14권 7책 258판으로 제작되었던 판본 중에서 현재 236판이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사대부들이 지배층을 형성했던 조선시대에 문집을 간행하는 일은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문집 간행은 엄청나게 비용이 드는 일이어서 왠만한 집안이 아니면 엄두를 낼 수 없는 작업이었다. 지난겨울 우리학교 학생들과 함께 대전 회덕에 있는 우암 송시열의 남간정사를 답사한 적이 있었는데, 상당한 분량의 목판본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을 문중에서 자랑스레 내보이는 것을 보았다. 그만큼 문집을 간행하고 목판본을 만들어 보관하는 일은 가문의 자랑이었으며 엄청난 역사(役事)였다.

이 곳에 보관 중인 삼봉집 목판본은 조선 후기 정조 때(1791년) 왕명에 의해 대구지방에서 만든 것이다. 삼봉집(三峰集)은 정도전이 살아있을 때(1397년)와 죽은 후 60여 년이 지난 세조 11년(1465) 그리고 성종 17년(1486)등 3차례에 걸쳐 간행된 적이 있었지만, 진법(陳法)과 시문(時文)을 수록하고 편차를 다시 분류하여 보다 체계적이고 사실에 가깝게 편찬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정도전의 학문의 범주는 무척 넓고 깊다. 문헌사에 보관중인 삼봉집 목판본의 내용만 해도 시(詩), 부(賦), 사(詞), 악장, 소(疏), 그리고 정치체제를 논(論)한 경제문감, 국가운영의 원칙과 정치사상을 담은 조선경국전, 철학사상인 불씨잡변과 심기리편, 심문천답, 군주의 도리를 논(論)한 경제문감 별집, 요동정벌을 목적으로 만든 병법서인 진법(陳法), 표(表), 전(箋)을 수록한 습유(拾遺) 등 엄청난 수준의 내용이다. 이 많은 내용이 한 사람에 의해 연구되고 저술되었다는 것이 그저 놀랄 뿐이다.

정종봉 씨의 안내를 받으며 문헌사와 목판각을 답사하였다. 문헌사는 1872년 이웃 산하리에 처음 건립된 뒤 1912년과 1930년에 은산리로 이전하였다가, 1970년에 현재의 위치에 목판각을 증축하여 이전한 것이다. 대구에서 보관 중이던 삼봉집이 이곳에 보관되기 시작한 것도 산하리에서 은산리로 이전하던 1912년이었다. 사당에는 "유공종공(儒功宗功)"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유학으로도 으뜸이요, 나라에 대한 공적으로도 으뜸"이라는 말이다. 이 편액은 고종 때 신원이 회복된 후 왕이 내린 편액이다. 사당 내부에는 정도전의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단출게 꾸며져 있다. 삼봉집 목판이 모셔진 목판고(木板庫)는 1칸짜리 작은 건물이다. 그러나 목판의 보관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콘크리트로 지은 탓인지 내부는 조금 습한 상태였다. 후손들에 의하면 목판고가 세워져서 그래도 보존이 잘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전에는 목판을 그냥 건물 바닥에 겹쳐서 쌓아놨기 때문에 썩거나 벌레가 먹어 손실된 것이 많다고 하였다. 다행히 서울대 규장각에 온전하게 보존된 것이 있어서 최근에는 새로 판각하여 보완하는 중이라고 한다.

사당을 나오면서 역사는 교훈과 감동과 반성이라는 어느 교수의 말을 떠올렸다. 정도전의 민본사상은 봉건체제 안에서 제기된 것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혁명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민심(民心)을 두려워하지 않고 개인의 이익과 당리당략(黨利黨略)에만 빠져 있는 요즘의 정치가들에게 정도전은 분명 다시 부활해야 할 정치가이다.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며, 민심(民心)을 얻지 못하는 정치가들은 권력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서릿발같은 목소리를 제발 우리의 정치가들이 들었으면 좋겠다.

<역사/문화기행>
저작권자 © 평택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