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쪽같은 성품 조광조…태어나고 어릴적 자란곳 평택 동령마을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18

김해규 (한광여고 교사)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 눈에 들어 악정 타파 개혁 전면에 부상
유교 근간 도학(道學) 정치 역설 인기…사사(死賜) 후 영의정 추증도



이충동(二忠洞)이라는 지명(地名)

평택시 이충동은 여느 마을이름과는 다른 냄새를 풍긴다. 일반적으로 마을이름이나 땅이름은 지형적 특징이나 역사적 사실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사례는 이충동 인근의 다른 지역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다. 예컨대 송북동의 소골마을은 진주 소(蘇)씨들이 세거한 데서 비롯되었고, 동막 못미쳐 주막거리는 조선 후기 우곡점이라는 점막(店幕)이 있었던 대서 유래한다. 이충동은 글자대로 해석하면 두 명(二)의 충신(忠)이 살았던 동네(洞)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 명의 충신은 요즘 모 방송국의 "여인천하"라는 드라마에서 젊은 개혁운동가로 각광받다가 훈구파에 의해 사사(死賜)되는 정암 조광조와, 병자호란 때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이었던 추담 오달제를 말한다.

조광조와 오달제가 평택의 이충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이들을 기리는 유허비와 충의각이라는 보호비각(碑閣)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충의각은 송탄고등학교에서 이충동 동령마을로 넘어가는 길 한쪽에 자리하였다. 이 고개에는 옛 성터가 있었다고 하여 주변 사람들은 성고개(城峴)라고 한다. 이 고개 너머에는 조선중기 조광조의 외가(外家)가 있었으며, 고개 아래쪽에는 오달제의 옛 집터가 있었다고 한다. 조광조는 집은 한양이었지만 외가(外家)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이 곳에서 보낸 것으로 알려졌으며, 오달제도 집은 한양이었으나 이곳으로 이사하여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달제도 큰 인물이지만 조광조와 같은 큰 인물이 평택지방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이들은 당대에도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지만, 후대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다. 특히 정암 조광조는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성현으로 추앙되었던 인물로서 조선시대에 사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에 대한 추모운동은 조선 후기 여러 지역에서 전개되었는데, 진위현(평택)의 유림들에 의해서도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요즘 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지역의 인물들을 발굴하고 추모하여 지역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사회의식하고도 맥이 닿아있다고 하겠다. 오늘은 조광조의 발자취를 따라 이충동 충의각과 유허비를 답사하려고 한다.

원칙에 충실했던 선비

조선 중종 때 신진사림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조광조는 본관이 한양으로 조선 개국공신 조온의 5대 손(孫)이다. 일반적으로 사림파(士林派)하면 조선 건국에 반대하며 향촌에 은거했던 사대부(士大夫)만을 생각하지만, 조광조의 경우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조광조는 학문적으로 기호사림의 거두 한훤당 김굉필의 제자이다. 그가 김굉필의 제자가 된 것은 17세 때 어천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와 있던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우면서였다. 알다시피 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로 소학(小學)을 중시하고, 경전에 근거한 원칙과 실천을 중시하는 학자였다. 젊은 시절 조광조는 강직하고 곧은 성품으로 학문에만 몰입하는 학자였다. 그가 얼마나 공부에 열심이었던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광인(狂人)이라거나 화태(禍胎)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조광조의 성품은 고지식할 정도로 곧고 원칙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얼마나 원칙에 충실한 학자였는지는 평소에도 길을 갈 때 의관을 단정히 하고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걸었으며, 좌우를 둘러보지 않고 앞만 보며 걸었다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도(道)가 아니면 행하지 말고,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식의 분명한 생활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언행은 평택지방에 전해오는 이야기 한 토막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조광조가 소년시절 서당에 다닐 때 그의 옆집에는 비슷한 또래의 댕기머리 낭자가 살고 있었다. 이 낭자는 날마다 책을 끼고 생각에 잠겨서 집 앞을 지나는 미소년을 보다가 그만 마음에 사모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낭자의 집안은 중인이어서 신분의 벽을 넘기가 어려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끙끙 앓던 낭자는 그만 마음에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 소문은 동네방네 퍼졌고, 낭자의 부모는 딸의 애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하여 조광조의 집에 사람을 보냈다. 서당에 가는 길에 한 번 만이라도 고개를 돌려 낭자의 얼굴을 봐줄 것을 청하는 부탁이었다. 그 후 낭자는 이제나저제나 사랑하는 도령이 한 번이라도 눈길을 줄까 고대하며 담장에 매달렸다. 하지만 낭자의 부탁을 전해들었을 조광조는 소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도(道)가 아니면 행하지 말고,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소녀는 상사병이 도져 자리에 눕게 되었고 끝내 세상을 달리하였다" 이 이야기는 조광조가 죽은 후 만들어졌거나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야기만으로도 그의 성품을 짐작하게 한다.

조광조는 28세 되던 1510년(중종 5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당시 사림유생들의 진출이 두드러졌던 성균관에서 도학(圖學)정치를 역설했던 그의 사상과 학문은 많은 유생들의 지지를 받았다. 1515년(중종 10년)에는 성균관 유생 2백 명의 천거와 문우(文友)였던 안처겸의 부친이며 당시 이조판서였던 안당의 추천으로 조지서사지라는 관직에 초임되었다. 또 그 해 가을에는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고, 전적, 감찰, 예조좌랑 등을 역임하면서 중종의 신임을 얻었다. 조광조가 개혁의 전면에 부상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현실에서 실패한 개혁

반정(反政)으로 즉위한 중종은 연산군 때의 악정(惡政)을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적 비젼을 제시해야 할 입장에 있었다. 그래서 사화(士禍)로 밀려난 신진사류들을 재 등용하고 유교적 정치질서의 회복을 위해 성리학을 장려하는 일에 힘썼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훈구파에 의해 농단된 정치개혁을 갈망하는 조광조와 같은 신진사류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중종과 조광조 두 사람의 만남은 정치와 사상계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중종의 신임을 받아 학술과 언론을 관장하는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관직에 나간 지 4년밖에 안된 1518년(중종13년)에는 대사헌으로 승진하였다. 대사헌으로 조광조는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훈구파라는 거대권력 앞에 타협이라고는 모르는 그의 태도는 젊은 신진사류들과 백성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조광조의 정치는 한마디로 도학정치(道學政治)로 압축될 수 있다. 그의 도학정치는 유교(儒敎)로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할 것(至治主義)과,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이었다. 또한 그는 개혁의 동인(動因)이 될 신진사류를 등용하기 위하여 현량과를 실시하고, 이들을 요직에 배치하였으며, 소격서를 혁파하고, 위훈삭제를 주장하며 반정공신을 압박하였다. 조광조의 생각은 중종반정 후 정국공신이 너무 많아졌고, 마음을 다하여 반정에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공신(功臣)이 된 경우도 많았으며, 이들이 권좌에 오른 후 나라와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먼저 도모하는 소인배(小人輩)의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주장은 당시의 일반적인 여론이었지만 훈구대신들에게는 자신들의 권위와 기득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로 인식되었다. 조광조 일파의 주장대로 위훈삭제 문제는 관철이 되었지만, 위기의식을 느낀 홍경주, 남곤, 심정, 김전 등 훈구파는 당파를 조장하여 정치를 어지럽힌다는 명분을 걸고 조광조를 탄핵하였다. 이들의 탄핵에 의해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당하고, 동지(同志)였던 김정, 김식, 박세희, 김구, 윤자임, 박훈 등도 투옥되었다. 능주로 유배당한 조광조는 그 해 12월 정권을 장악한 훈구파에 의해 사사(死賜)되었으며, 김정, 기준, 한충, 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 또는 자결하였다. 이 사건을 후대 사람들은 기묘사화(1519년)라고 한다.

조광조를 기억하려는 사람들

불의와 타협하고 백성을 희롱하며 특권을 누리는 지배층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의기(義氣)가 있고, 비판의식이 있는 젊은 세대의 도전이다. 중종 때의 훈구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훈작(勳爵)과 권력 그리고 불의(不義)하게 쌓은 재물로 자신 뿐 아니라 자손 대대로 영화를 누리고 싶어했다. 그들에게 비7리를 지적하고 백성들의 이익에 반(反)하는 특권을 타파하려는 신진사류의 주장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들이 기묘사화를 일으켜 신진사류를 제거한 것은, 돈과 권력밖에 없는 그들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이 그리 간단하고 녹록한 것이 아니다. 역사에는 정의(正義)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正義)가 없고 명분(名分)이 없는 권력자를, 역사의 영원한 승자로 만드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가 죽은 후 불과 몇 십 년이 지나지 않아서 조광조는 명예가 신원되었을 뿐 아니라 정1품 영의정이 추증되었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또 율곡 이이 등의 건의에 의해 사대부의 최고 명예인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1570년에는 능주의 죽수서원과 용인의 심곡서원, 희천의 양현사에 배향되었고, 율곡 이이에 의해 동방4현으로 존숭되기까지 하였다. 심지어 조광조를 한 번도 보지못했던 사람들조차 그의 학통을 이었다고 주장하는 웃지못할 해프닝도 생겨났다.

평택시 이충동에 조광조의 유허비가 세워지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존숭운동의 하나였다. 유허비가 세워진 1800년은 급격한 사회변동으로 신흥양반층의 성장이 두드러졌던 시기이며, 이 때문에 향촌사회에서는 구 양반과 신 양반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 치열해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회변동의 틈바구니에서 새롭게 부상한 신흥 양반들은 조광조 유허비 건립운동을 주도하여 평택의 향촌사회에 주도권을 잡으려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마을 이름까지 이충동으로 하여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확고히 창출하려고 시도했을 수도 있다.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조광조가 죽은 후 몇 백 년이 지나도록 사람들이 가슴에 의미 있는 사람으로 남아있었다는 것은, 반성 없는 족벌언론의 행태와 일부 지식인과 정치인들의 반역사적인 태도를 보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

<역사/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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