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사옥 때 참형 후 영의정 추증되고 신장1동 묘역부변은 제역(除役) 마을로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17

김해규 (한관여고 교사)


처사(處士)라는 선비들

조선시대에는 산림처사(山林處士)라는 부류의 선비들이 있었다. 세상에 대한 변혁의 의지는 있지만 불의한 현실에는 동조하지 않으면서 재야의 비판세력을 형성했던 선비들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화담 서경덕이나 남명 조식처럼 학식과 덕망에서 크게 추앙받는 인물들이었으면서도, 지식과 덕망을 탐욕과 바꾸지 않고 시대의 아웃사이더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처사(處士)들은 권력과 재물보다 삶의 명분(名分)과 의리(義理)를 목숨보다 중히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뜻 있는 선비들은 처사(處士)를 꿈꾸었으며, 처사(處士)임을 자처하기도 했지만 진정한 처사는 역사에서 손꼽을만큼 적다. 그 가운데 조선 중기 송탄에서 살았던 최수성은 학식과 덕망이 당대에 크게 알려졌으면서도 처사(處士)로서 의롭게 살다 간 선비였다.

16세기 중반의 진보주의자는 재야 사림(士林)이었다. 이들은 조선왕조 건국을 반대하였던 고려 말 온건파 신진사대부의 후예들로서, 성리학이 지향하는 대의(大義)와 명분(名分)을 목숨처럼 여겼던 부류들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들의 사상(思想)은 조선건국의 주체였던 관학파(官學派)에 비하여 관념적이고 보수적이었지만, 여러 차례의 정변으로 국가에 공(功)이 많았던 훈구대신들이 정권을 세습하고 권력형 부정부패를 일삼던 16세기의 상황에서는, 원칙에 충실했던 이들이 진보주의자였다. 그러나 진보(進步)는 항상 핍박받게 마련이어서 16세기 초, 중반에 전개된 사림파의 개혁의 목소리는 훈구파에 의해 무참하게 압살당하였다. 요즘 "여인천하"라는 모 방송국의 사극(史劇)드라마로 잘 알려진 조광조의 개혁은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이다. 기호사림(畿湖士林)에 속했던 최수성은 중종 때 개혁의 주체들이었던 조광조, 김정 등과 학문과 사상을 같이하였던 평택지방의 대표적인 신진사류(新進士類)였다. 그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원칙에 충실하며, 의리(義理)와 명분(名分)을 위해 삶을 내던진 처사(處士)였다.

남산과 제역동

송탄시 신장1동은 미군부대 안에 수용된 남산(南山)을 중심으로 제역마을, 남산마을, 목천마을, 구장터 마을이 흩어져있다. 이 가운데 제역(除役) 마을은 이름이 독특해서 눈길을 끈다. 제역(除役)이라는 말은 "역(役)을 면제받았다"는 뜻으로, 조선시대에 국가나 관청의 특수한 역(役)을 지는 대신 양인(良人)의 의무였던 공역(公役)을 면제받은 것을 의미한다. 이 마을이 제역동(除役洞)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6세기초 기호사림의 존경받는 학자로서 신사무옥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원정 최수성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최수성은 본관이 강릉으로 강릉에서 태어났다. 그가 진위현(현 평택시)으로 이사한 것은 8세되던 1495년이었다. 조선 전기 양반들은 처가나 외가의 재산상속 등의 이유로 처가나 외가 근처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수성의 경우에도 그랬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일찍이 기호사림의 터를 닦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조광조, 김정, 김식 등과 학문을 익혔다. 최수성과 5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조광조도 외가가 있는 평택시 이충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이들은 어려서부터 함께 수학하며 교유(交遊)했을 것으로 보인다.

최수성은 젊은 시절부터 학식과 덕망 그리고 강직한 의리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며, 시(詩), 서(書) 화(畵)에 능했던 촉망받던 인물이었다. 그의 젊은 시절의 활동은 평택지방 보다는 고향이었던 강릉에서 전개되었다. 젊은 시절 그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로는, 강릉부사로 부임하였던 한급이라는 인물이 딸을 최수성에게 시집보내 자신의 어려운 일을 해결하려고 했던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수성은 평소 호방하고 의리를 중시하는 성격인데다, 불의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성품이 어우러져 출세(出世)에 큰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중종 때의 개혁세력이었던 조광조, 김정 등과 빈번히 접촉하였다. 특히 최수성이 제역동 뒤편 남산 기슭에 세운 원정(猿亭)은 개혁세력의 회합장소로 이용되었는데, 이와 같은 태도는 의롭지 못한 현실에는 비판적이었으나 현실개혁에는 방관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현실에 정면으로 맞선 실천적 지식인

최수성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격은 당대의 실력자 남곤과 숙부였던 최세절에 대한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숙부 최세절은 심지가 바르지 못하고 술수에 능해서 중종 때 권세를 누렸던 심정, 남곤 등과 어울리더니 승지(承旨)벼슬까지 하게 되었다. 이것을 본 최수성은 불의한 자들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님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어 보냈다.

해 저문 창강 위에 날은 차고
물결이 절로 이네
외로운 저 배 일찌감치 대어라
밤이 오면 풍랑이 높아지리

이 시(詩)는 훈구파의 시대가 가고 의로운 사림(士林)들의 새 시대가 올 것이므로 차라리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여생을 마칠 것을 권유하는 시(詩)였다.
또 당대의 권세가였던 남곤이, 당나라 때의 시인이며 화가였던 왕유의 망천도(輞川圖)를 얻고 크게 기뻐하며 김정에게 화제(畵題)를 요청하였다. 왕유는 만년(晩年)에 남전지방의 망천(輞川)이라는 곳에 초막을 짓고 벗이었던 배적(裵迪)이라는 인물과 배를 띄워 노닐며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는데, 이같은 삶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망천도였다. 마침 김정의 집에 놀러간 최수성이 망천도를 보고는 자신이 화제(畵題)를 붙이겠다고 자처하였다.

秋日下西岑 가을 해는 서산에 지고
暝烟生遠樹 어스름은 먼 나무에 피어오르네
斷橋兩幅巾 끊어진 다리에 두건 쓴 두 사람
誰是輞川主 누가 망천의 주인일까

위의 시(詩)는 망천도의 정경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듯이 보이지만, 남곤의 정치적 행보와 최수성의 비판적 시각을 감안해서 읽으면 대단히 비판적인 의미를 담고있는 시(詩)이다. 특히 마지막 구절인 "누가 망천의 주인일까"라는 내용은, 정치를 농단하고 사대부의 도리를 저버린 남곤은 결코 망천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선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남곤 너는 지금은 권세를 누리며 세상을 호령하지만, 역사의 심판은 너를 왕유처럼 망천에서 유유자적하는 만년을 보내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최수성만이 할 수 있는 세련되고 멋진 한 방의 펀치였다. 위의 두 편의 시(詩)는 최세절과 남곤을 매우 분노케 하였으며, 최수성에 대해 가슴 깊이 앙심을 품게 되었다.

살아서는 역적, 죽어서는 영의정

최수성의 나이 33세에 일어난 기묘사화(1519년)는 세상으로 향한 그의 마음을 닫아걸게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평생의 벗이었던 조광조와 김정이 죄 없이 사약을 받은 것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 후 최수성은 명산을 유람하며 술과 시(詩)와 거문고를 벗하고, 뜻맞는 사람을 만나면 그림으로 마음을 표현하였다. 그의 학문과 재주 그리고 의로운 자세는 많은 사람들의 동정과 칭송을 받았지만, 불의한 세상은 그를 놓아두지 않았다. 기묘사화(1519년) 후 훈구대신들이 주도한 신사무옥(1521년)에서, 죄가 없음을 세상이 아는 데도 불구하고 최세절과 남곤 등의 모함에 의해 참형을 당한 것이다.

젊은 나이에 뜻을 펴지도 못하고 죽었지만 사람의 인생이란 생물학적인 수명으로만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의 삶이란, 살아서보다 죽어서의 삶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실록에는 최수성의 사후 그를 죽인 남곤이나 심정, 최세절 등이 세인의 손가락질을 받다가 탄핵되는 내용이 자주 눈에 띈다. 반면 최수성은 죽은지 불과 18년이 지난 1538년(중종 33년)에 명예가 신원(伸寃)되었고, 1540년(중종 40년)에는 종1품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1545년에는 정1품 영의정에 추증되는 영광을 얻었다. 이와 함께 남산(평택시 신장1동)에 묻혔던 그의 무덤은 율곡 이이의 건의에 이해 성역화되었으며, 무덤 주변 10리 안에 있는 마을의 부역을 면제하고 묘를 관리하도록 조처되었다. 또 그의 증조부 최치운 등 12현과 함께 강릉 향현사에 배향되었고, 강릉의 화동서원에는 정몽주와 함께 배향되는 기쁨을 얻었다.

최수성은 한 시대의 진보를 이끌어 낸 선비였으면서도 평택에는 그와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이 거의 없다. 그의 후손들인 강릉 최씨 진위파도 대부분 고향을 떠났고, 원산(猿山)이라고 불렸던 남산은 대부분 송탄 미군기지로 수용되었으며,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무덤도 70년대 미군기지로 수용되면서 강릉으로 이장하였기 때문이다. 조광조와 김정, 그리고 평택지방의 벗이었던 최자반과 우남양이 만나 시대를 논하고 의기(義氣)를 모았던 원정(猿亭)마저도 지금은 정확한 위치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묘를 관리했던 제역마을도 지금은 미군부대 담벼락 한 쪽에 낙후된 마을로 남아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고, 시대를 초월하여 추앙받는 인물에 대한 대접치고는 참으로 초라하다 아니할 수 없다.

<역사/문화기행>
저작권자 © 평택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