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전국농민회 총연맹 고문

[평택시민신문] 커다란 보름달이 머리곰 비추이는 한가위가 얼마 전 지났다. 점점 배를 불려 오는 한가위 달은 평온하고도 공연하게 누구에게나 고루비추는 평등하기 그지없는 달빛임이 틀림없다. 선비들의 달 감상이야 이름난 일로 여기저기 망월(望月), 명월(明月)하여 지명이나 정자이름으로 남아있으니 알 일이지만 일반 민중들이 그런 호사를 누릴 틈은 없었을 것이다. 한가위가 되어서야 비로소 커다란 보름달 밑에서 밤늦도록 노래 부르고 춤추니 모두에게 내리는 평등한 자연의 혜택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한가위를 최대 명절로 삼았고 짜증나는 귀성전쟁 속에서도 한가위를 즐기는 것 일게다.

얼마나 좋은 날이었으면 다산의 노년기 학문적 동지였던 김매순은 이렇게 말했다. 加也勿 减也勿 但願長似 嘉俳日.(가야물 감야물 단원장사 가배일) 물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민간의 말을 차용해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남겨놓은 것이다. 양반네들도 한가위는 무지무지 좋은 날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한가위의 유래가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신라 3대 유리왕 9년(서기 32년)에 왕이 6부를 정하고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부내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여 두 패로 나누어 7월 16일부터 날마다 길쌈을 하도록 했다. 그러다 8월 15일에 이르러 승패를 가려, 지는 편이 술과 밥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게 사례하고 즐겁게 놀았다고 한다. 이것을 가배(嘉俳)라 했는데, 진편의 여자가 춤을 추면서 ‘회소곡’을 불렀다고도 한다.

‘會蘇會蘇(회소회소)’라 구슬프게 불렀다고 하는데 여러 해설이 분분하다. 하지만 정황이나 곡의 정조가 지금도 우리가요에 남아있는 ‘아서라 말어라’와 같은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김종직은 노래가 남아 전하지 않자 스스로 그 가사를 적어놓았다. “회소곡(會蘇曲), 회소곡(會蘇曲), 서풍이 넓은 뜰에 불어오면, 명월이 집안에 가득하구나. 공주는 앉아서 길쌈을 할 때 6부의 여자들이 모여드는구나. 네 광주리 가득 찰 때 내 광주리 비노라. 술 마시며 야유하고 놀 때, 한 여자 일어나 탄식하면, 모두들 베짜기 권하노라. 가위질 놀이 규중의 행동을 잊는다 하여도, 서로 쓸데없이 싸우는 것보다 나으리.” ‘여지승람(輿地勝覽)’

그러니까 한가위에는 노래를 했다는 것이다. 음식을 나누고 놀이도 했지만 중요한 것은 노래다. 노래하고 춤추는 형태는 강강술래, 멍석말기 등이었다. 이는 대부분이 노동요로써 일하면서 하던 노래를 놀이로 끌어들인 듯하다. 지금도 한가위에 공연이란 이름으로 시연되기도 한다. 근대에 들어서 이런 전통을 이은 것이 마을 콩쿠르 대회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7,80년대 시골의 한가위는 반드시 지역 콩쿨대회가 있어 노래 꽤나 하는 이들이 가슴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기도 했던 것을 보면 한가위엔 노래와 춤으로 즐기는 명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가위는 경작의 노동과 수확의 노동을 연결하는 고리이기에 풍요롭기 그지없고 노동의 한 형태를 춤과 노래로 이어낸다는 의미가 숨어있을 것이다. 물론 근대 이후 노래는 거의 사랑타령으로 변질된 노래들인데 이는 일본의 엔카의 영향이라고 본다.

요즘엔 그런 부분을 대부분TV가 차지해 버려 모두 TV앞으로 몰려든다. 그러다 흥이 나면 노래방으로 달려가 신나게 노래를 불러 제껴 스트레스도 풀고 몸속에 각인된 조상들의 피내림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한다.

한가위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란 말을 많이 한다. 가난하던 시절을 살아온 선인들은 한가위 명절 때 차례를 지내려고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배부르게 먹으니 얼마나 행복했겠는가? 그래서 그런 말이 생겼을 것이다.

 
신도주 올여송편 박나물 토란국을/ 선산에 제불하고 이웃끼리 나눠 먹세/ 며느리 말미 받아 친정집에 다녀 갈제/ 개잡아 삶아 얹고 떡고리며 술병이라/ 초록장옷 반물치마 차려입고 다시 보니/ 여름동안 지친 얼굴 회복이 되얐느냐 -정학유의 농가월령가 8월령 일부
 

정학유는 다산의 둘째 아들이다. 능내리 마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그가 남긴 일기장에 기록된 것 중 한가위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이렇게 풍요로우니 며느리 얼굴에도 화색이 든다고 학유는 기록했다. 대표적인 게 올여송편이다. 이것은 올해 난 햅쌀로 만든 것이다. 신도주도 햅쌀 술이다. 그밖에도 토란국, 화양적, 누름적, 닭찜 등이 있다. 이런 추석음식을 만들어 먹으면 여름 노동으로 심신이 피로해진 농민들이 충분한 영양보충도 가능하리라 믿는다.

이달엔 백로 추분이 드는 달이다. 백로는 9월 7,8일에 드는데 풀잎에 이슬이 흠뻑 내린다는 뜻이다. 인조임금 시절 이명한은 이렇게 노래했다.

 

“샛별지자 종다리 떳다/ 호미메고 사립나니 긴 수풀 찬이슬에 베잠뱅이 다 졌는다/ 아이야 시절이 좋다손 옷이 젖다 관계하랴
 

백로에 들에 나서면 바짓가랭이가 젖는 것은 농부로선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양반인 이명한이 농사를 지었는지 알 수 없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바짓가랭이 젖는 일을 즐기듯 읊조린 이명한이 야속할 뿐이다.

추분은 황도를 따라 움직이는 태양이 천구의 적도와 교차하는 지점이며 황도 180도이다. 올해는 9월 23일 7시 57분이다. 완연한 가을 기운이 느껴지는 시기로 가을걷이에 분주한 시기라 할 수 있다. 농가월령가 8월령을 다시 보면

 
백설 같은 면화송이 산호 같은 고추다래/ 처마에 널었으니 가을볕 명랑하다
안팎마당 닦아놓고 발채 망구 장만하소/ 면화 따는 다래끼에 수수이삭 콩가지요/ 나무꾼 돌아 올제 머루다래 산과로다/ 뒷동산 밤 대추는 아이들 세상이라/ 아람도 말리어라 철대어 쓰게하소
 

수확의 기쁨은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안다. 지금처럼 상업농이 아니었던 시절의 풍년은 그야말로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산천에 감사하고 이웃과 나누던 풍습은 사회적 안전망에 해당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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