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열 영어해설사
평택시문화관광해설사회

[평택시민신문] 평택의 역사·관광 문화 자원에 대해 시민들이나 평택을 찾아오는 외지인들에게 현장을 돌며 설명하는 일을 하고 있다. 공무원을 퇴직하고 평소에 좋아하던 영어를 활용해서 할 수 있는 봉사를 생각하다가 평택시 문화관광해설사회에 들어가 영어해설사를 시작했으니 8년쯤 되었다.

활동을 시작한지 2년쯤 된 7월이었다. 장마철이라 아침부터 비가 주죽 주룩 구성지게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소식이 있으려나 하는 생각에 전화기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기다리고 있던 전화가 걸려왔다.

몇 달 전 일이었다. 그날도 송탄 관광안내소에서 해설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오산 사시는 노인 한 분이 오셔서 “건너편에 영어 번역사무실에 볼 일이 있어 왔는데 문이 잠겨 있고 전화 연락도 안 돼 걱정”이라며 영어를 할 수 있느냐고 물으셔서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면 도와드리겠다고 하자 사연을 말씀하셨다.

30년 전에 덴마크에 입양한 두 딸한테서 영어로 쓴 편지가 와서 읽고 답장을 써야 하는데 번역사무실 사람이 안 나왔으니 어떡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편지를 읽어드리고 아버지를 대신해서 상호간의 안부를 전하고 묻고 한국에 방문하여 상봉을 간절히 바란다는 내용으로 편지를 부쳐드렸다. 이후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답장이 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좋을 일 하고도 공연히 미안한 마음에 노인 분한테 두어 번 확인 전화를 했었다. 그분한테서 전화가 온 것이다.

반갑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대뜸 답장이 왔느냐고 물었더니 편지 답장이 아니라 딸들이 지금 한국에 와있다고 대답하셨다. 덴마크에 입양된 두 딸과 양부모, 사위, 손주 그리고 둘째 딸의 예비신랑까지 7명이 서울에 있는 호텔에 머물고 있는데 곧 오산 집으로 오기로 했다며 통역을 부탁하셨다.

딸들을 덴마크에 입양한 사연은 이랬다.

30년 전, 충청북도 첩첩 산골 마을에 살던 22살의 청춘남녀가 풋사랑에 빠져 살림을 시작했다. 어려운 형편에 결혼식도 못 올리고 두 딸을 낳았다. 큰 딸이 27개월, 작은 딸이 2개월일 때 부인이 병들어 세상을 떠나고 노부모마저 돌아가시자 혼자서 아이들을 키울 수 없는 아버지가 친척 누님의 도움으로 홀트 아동입양 기관에 딸들을 맡기고 말았던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두 딸은 양어머니가 교사이고 양아버지가 엔지니어 기술자인 덴마크의 원만한 가정에 함께 입양되었다. 아쉬울 것 없는 어린시절을 보내고 대학을 마친 두 딸은 훌륭하게 장성하여 큰딸은 결혼해 6살 된 아들을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더욱 감격스러운 것은 덴마크 양부모님들이 자매를 잘 기르기 위하여 본인들의 자식 낳기를 자제하고,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양육하였다는 것이다.

14년 전에도 양부모님이 두 딸의 친부와 뿌리를 찾아주기 위해 한국에 왔으나 애석하게도 찾지 못했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둘째 딸이 한국에서 덴마크에 입양된 친구에게서 우연히 아버지 소식을 알게 되어 만나게 되었다. 작은 딸은 아버지 소식을 듣고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생부의 새로운 가정에 누가 될까 싶어 망설이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아버지는 딸들을 입양하고 소식을 모르고 어렵게 살아왔으며, 새로운 가정을 뒤늦게 꾸려 남매를 낳고 살아가고 있었다. 딸들과 만남을 위해서 자택에서 성찬을 준비해 주신 새어머니의 정성도 기억에 남는다.

30년만의 상봉 현장에는 가족과 친척 수십 명이 모였다. 이어서 덴마크에서 오신 양부모님과 사위, 두 딸과 손주가 도착하고 가족 간의 눈물어린 인사가 영어로 통역되었다. 생부는 양부모님께 그동안의 노고에 대해 감사 인사를 거듭했고, 두 딸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진심으로 전했다. 이어서 30년 전에 너무나도 어려웠던 상황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주고받으며, 딸들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생부는 딸들에게 미안했던 마음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생선가시를 바르고, 고기를 잘라 서른이 넘은 딸들 밥그릇에 연실 놓아주며 미안한 마음을 전하였다.

두 딸은 한국말을 몰라서 통역으로 가르쳐 주었더니 어렵게 아빠! 아빠? 불렀다. 옆에서 보기에 정말로 눈물겨운 장면들이었다. 그날 상봉 이후에 생부를 대신해 두 자매에게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상봉을 기뻐하는 생부의 안부를 전해주고 차후에도 전달할 게 있으면 대신해 줄 것을 약속했다. 영어해설사로 활동하면서 마음 뿌듯하고 행복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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