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 길목에서

박경순 시인
평택섶길 추진위원

[평택시민신문] 사계절 중 유일하게 봄 앞에는 ‘새’를 붙이고 설레며 기다린다. 기다려도 오고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것이 봄이라고 어느 시 구절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모처럼 섶길 표지판 보수 작업에 참여했다. 파란 하늘이 기분 좋게 화창하다. 들에는 쑥, 냉이가 쑥쑥 올라와 지난겨울 추위를 거뜬히 이겨냈다고 봄바람에 살랑거린다.

오늘은 팽성 안정리 미군 부대 앞 표지판을 보수했다. 태극기와 성조기가 봄바람에 펄럭인다. 미군 부대 정문 양쪽에 대치하고 있는 또 다른 두 개의 기는 팽팽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다. 한쪽에서는 태극기부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미국과 우대관계를 돈독히 하자는 내용의 현수막을 펼쳐놓고 도로변을 점거하고 있었다. 천막을 치고 마이크를 설치하고 제법 큰 규모다. 도로 맞은편에는 여대생처럼 보이는 여성이 피켓을 들고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성에게 다가가 추운 그늘에 서 있는 것이 안타까워 햇살이라도 비추면 좋을 것 같다고 소곤거렸고 한 분은 쌈짓돈을 털어 점심 값으로 건네주었다.

30년도 훨씬 넘은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데모대에 합류하지 않았다고 친구에게 비난 섞인 말을 들었던 기억이다. 1인 시위하는 여학생을 보면서, 지나온 날들이 떠오르고 지금의 나와 마주했다. 어떤 상황이 어린 친구를 저처럼 씩씩하고 용감하게 만들었을까? 사상이나 이념으로 추운 그늘에서 고독한 투쟁을 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현재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현실의 축소판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보수 작업은 수월하게 진행되었고 점심을 먹고 평택호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평택호 잔디밭에 세워진 혜초비 앞이다. 봄기운이 완연하다. 가족들과 함께 나온 어린이들이 자전거를 씽씽 달리고 있었다. 데이트를 줄기는 젊은 연인들이 호반을 거닐고, 다양한 음식을 선보이는 푸드 트럭과 좌판들이 눈에 띄었다. 한편에서는 카이트와 윈드 서퍼들이 장비를 정비하며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기 넘치는 봄풍경이다.

권관리 마을을 들어서니, 붉게 피어오른 홍매화가 봄 햇살에 맘껏 자태를 뽐내고 있다. 과실나무는 꽃봉오리들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밭고랑에는 봄나물 캐는 부부가 있고 자전거 동호인들이 라이딩을 즐기며 휙휙 지나쳐갔다. 봄 기운 담긴 힘찬 풍경들이 안정리 미군부대 앞에서 달고 온 무거운 마음들을 톡톡 건드리며 위로해주었다.

‘진정 위대한 모든 생각은 걷기로부터 나온다’ 는 니체의 말을 떠올리며, 걸었던 봄날이 화려했다. 볼 것 많아 봄이라는 계절, 모든 것의 끄트머리에는 희망이 달려 있다는 것을 발걸음마다 새기며 걸은 봄, 오늘이 그날이었다.

*섶길을 따라 걸으면 평택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평택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