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수 준장

육군군사연구소장
시인·수필가

[평택시민신문] ‘아침놀에 비치는 차령산 줄기 시원하게 펼쳐진 천리 소사벌...’
안성에서 태어나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이웃인 평택으로 유학하여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지금도 가끔 고등학교의 교가를 마음속으로 흥얼거린다. 젊은 시절의 꿈을 키워준 소사벌 벌판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음이다.
그 시절의 평택은 조그만 소도시였다. 아직 시로 승격되기 전이었기에 인구도 그리 많지 않았다. 당시는 교통도 썩 좋지 않아 3년 내내 학교 인근에서 하숙을 하면서 공부를 했다. 밤늦게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근처의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개구리 울음소리도 우렁차고,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소리도 시끄러웠던 풍경이 떠오른다.
그러던 평택이 날로 발전을 거듭해 이제 어느덧 인구 50만을 바라보는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그 사이에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사에 진학, 지금까지 군복을 입고 있는 현역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다. 군 생활을 하면서는 평택을 찾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평택에서 근무하거나, 평택에서 가까운 곳에서 근무한 적도 없었고, 늘 대비태세를 유지해야 하는 군인의 삶이기에 자주 찾아오지도 못했다. 일부러는 아니더라도 동창회나 반창회 등 모임에는 가끔이나마 얼굴을 비추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평택은 늘 아련한 고등학교의 추억만이 남아있는 도시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던 중에 최근에 와서 평택을 몇 번 다녀올 일이 있었다. 주로 열차를 이용해서 다녀오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평택의 관문이기도 한 민자 역사를 보면서 달라진 모습을 한 눈에 실감할 수 있었고, 곳곳에 들어선 아파트와 고층 빌딩, 여기저기 조성된 산업단지들을 보면서 발전하고 있는 평택의 모습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어 마음이 뿌듯했다.
이렇게 평택이 크게 발전한 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말 같지만 무엇보다도 평택을 아끼고 사랑하는 평택시민들의 힘이 컸음은 자명하다. 내 학교 동기동창들 중에도 많은 친구들이 고향을 지키며 나름대로 평택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 힘으로 인해 오늘날 평택이 있는 것이라 확신한다.
그 이외에 여러가지 요인들, 예를 들면 환태평양시대를 맞아 서해의 관문 역할을 하는 평택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것도 있을 것이고,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과 빠른 시간 내에 통하는 교통의 발달로 인한 것도 클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보태어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을 들고 싶다. 그것은 바로 평택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중요한 군사도시라는 점이다.
우리 평택 시민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주한미군들의 메카라 할 수 있는 캠프 험프리가 평택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곳저곳에 있던 미군부대들이 부대 이전을 해 험프리로 집결하였다. 평택이 명실상부한 한미동맹의 본산이요, 핵심으로 떠오른 것이다.
여러가지 우여곡절 끝에 평택으로 이전한 미8군사령부가 부대 이전식을 한 날, 필자는 행사에 초대되어 자리를 함께 했다. 참으로 감개가 무량했다. 평택에서 꿈을 키웠던 젊은이가 반백의 군인이 되어 평택 땅에서 이루어지는 한미동맹의 현장, 국가안보의 현장에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지기까지 했다.
다시 일터로 돌아온 후 평택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라의 역사, 세계의 역사에는 관심이 많지만 자기가 나고 자란 고장의 역사 즉 향토사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 역시 잘 알지 못하기에 더 궁금하기도 했다. 이충동이 조선조 두 명의 충신인 정암 조광조 선생과 삼학사 중의 한 분인 오달제 선생을 기리기 위해 명명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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