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퉁이 떨어져나간 하마비 아름다운 건물 팽성성당 이전 복원에 아쉬움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 - 16

김 해 규 한광여고 교사


성공회 팽성교회

평소 평택지방을 연구하는 단체가 없는 것을 아쉬워하던 중 지난 겨울부터 그동안 향토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몇 몇 사람이 모여 "평택역사문화연구회 준비위원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에서는 매주 향토사연구에 관한 이론학습과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향토유적답사를 계획하였다. 몇 달이 지나는 동안 회원들의 사정으로 답사를 한 번도 못하다가 지난 5월 19일에 첫 답사를 하였다. 주제별로 답사하기보다는 지역별로 나누어 답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우선 찾은 곳이 팽성읍지역이었다.

대동법시행기념비를 답사하고 팽성읍에서 평택객사를 거쳐 평택향교로 향하였다. 팽성읍은 평택현의 옛 읍치(邑治)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너무 쇄락하여 옛 고을의 위세를 느낄 수 없다. 최근에는 인구도 감소하여 초등학교의 학급 수도 줄여야 할 형편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변화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요즘 세상에서 변화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매력이다. 팽성읍에서 근대 건축물 가운데 하나였던 성공회 팽성성당(요한성당)은 내가 향교를 답사하기 전 즐겨 찾는 답사지이다. 1936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진 성공회 성당은 외래문화의 주체적 수용이라는 가치를 보여주는 건축물이었다. 본래 성공회라는 기독교는 영국국교회를 말하는 것으로 성격상 "문화의 주체적 수용"이라는 명제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만, 한국에 들어온 성공회는 개신교의 다른 종파들이 서구 문화에 대한 우월주의적 입장을 지향한데 비하여 토착문화의 주체적 수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성공회 계통의 교회건축에는 종종 우리건축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띈다. 그 중 대표적인 건축물이 강화도에 있는 성공회 강화교회이다. 성공회 팽성교회는 그보다는 못하지만 토착문화와의 접목에 성공한 건축물로 평가할 만하다. 초기에는 기단부에 돌 축대를 쌓고 팔작기와지붕을 올린 전통적인 한옥이었던 이 건축물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벽돌로 기단과 벽를 보수하였지만 원형을 손상시키지 않아 보는 이로 하여금 옛 건축의 묘미와 향수를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그랬던 이 건축물이 제작 년부터 시작된 택지개발 공사로 철거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주임 신부님의 말로는 교우 중 한 분이 부용초등학교 옆으로 이전 복원하여 개인 주택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예전 모습은 아닌 듯하다.

평택향교

평택향교 앞은 스테인레스로 만들어진 바리케이트가 설치되었다. 바리케이트를 넘는 기분은 남의 집 담장을 넘어가는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홍살문 옆으로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있다. 하마비는 동네 아이들이 비석치기를 하였는지 왼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다. 하마비(下馬碑)는 "이곳은 공부하는 신성한 장소이니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리고 예의를 갖추라는 뜻이다. 이 표석은 옛 사람들의 학문에 대한 경건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유물인데, 요즘으로 치면 "학교 앞이니 경음기를 울리지 마시오"라는 표지판쯤 된다고 하겠다.

평택향교는 중부지방의 향교가 다 그러하듯 전학후묘(前學後墓)식 공간배치를 하였다. 전학후묘라는 말은 앞에 강학공간(講學空間)이 있고, 선현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祠堂)이 뒤에 배치된 형태를 말한다. 내가 답사했던 향교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향교가 경남 산청의 단성향교였는데, 이 향교의 공간배치도 전학후묘였다. 우리가 찾아갔을 때 강학공간으로 들어서는 외삼문은 굳게 잠겨져있었다. 이런 날은 꼭 책가방 들고 학교에 갔는데 학교 문이 잠겨있는 기분인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옆으로 난 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향교의 건물배치는 성균관(成均館)의 공간배치를 기본으로 하였다. 평택향교의 경우도 그러한데, 외삼문 안에는 명륜당과 동, 서재가 배치되고, 내삼문 안에는 사당(祠堂)인 대성전이 배치되었다. 강당(講堂)인 명륜당은 중건시기가 19세기 말인데 옛 건축의 위세와 고풍스러운 맛은 적지만 소박하고 단아한 것이 조선 선비의 검약한 정신을 느끼게 한다. 사실 평택과 같은 작은 고을에서 향교와 같은 대형 건물을 중건한다는 일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다. 명륜당이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중건되었던 것도 이 고을의 경제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명륜당 대청마루와 동, 서재의 방안에는 최근에 행사가 있었는지 돗자리가 깔려있다. 명륜당 대청에 걸린 중수기에는 몇 차례의 중수과정에 참여한 지방 유림들의 이름이 걸려있다. 중수기에는 19세기 말의 중수과정과 해방을 전후하여 몇 차례의 중수와 보수가 있었음을 보여주며, 가장 최근의 중수로는 1979년에 전교 박세홍의 주도로 중수한 것이었다. 중수기에 이름이 올라 있는 성씨에는 청주 한씨, 온양 방씨, 평택 임(林)씨, 곡부 공(孔)씨, 진주 강씨 등 옛 평택현의 주요 사족(士族)들의 이름이 눈에 띈다. 이들 사족들은 조선시대 향시 합격자 명단인 사마방목(司馬榜目)에도 올라있는 성씨들로서 향촌사회의 지배세력이었다.

외삼문에 비하여 내삼문(內三門)은 잠겨있지 않아서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대성전 앞에는 평택향교의 역사를 가늠케 하는 오래된 향나무가 몇 그루 있다. 1999년에 경기도 박물관에서 편찬한 평택의 역사와 문화유적에는 이 향나무의 수령을 350년이라고 하였는데, 나무 앞 안내판에는 250년이라고 되어있어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향나무의 향(香)은 머리를 맑게 해주는 효능이 있어서 일반적으로 사원이나 학교에 많이 심었다. 그래서 옛적에는 향나무 가지치기를 하게 되면 마을 사람들이 나뭇가지를 한쪽씩 얻어다가 향을 피웠다고 한다. 이 말에 경도된 실험정신 강한 장연환 선생이 죽은 향나무 가지를 가지고 라이터로 불을 붙여보는 실험을 하였는데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향교와 서원은 배향인물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향교(鄕校)가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현들을 배향하는 교육기관이라면, 서원(書院)은 특정 인물을 배향하는 것이 차이점이다. 그렇다고 향교에 배향하는 인물이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기본형은 있지만 지역적 여건이나 학문적 경향에 따라 배향하는 인물이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예컨데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이라고 해도, 학파와 지역에 따라 평가가 크게 다른 송시열 같은 인물이 대표적인데, 기호지방에서는 배향되었지만 경상도 지방의 향교에서는 배향대상에서 제외시키는 경우가 있다. 향교의 배향인물의 정석은 공자를 주존으로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중국의 4성(聖)과 민손, 염경 등 10철(哲), 주희, 주돈이, 정호 등 송나라 때의 6현(賢), 동국 18현이라고 해서 최치원, 설총, 안향, 정몽주 등 문묘에 배향된 우리나라의 18현을 모시는 것이다. 평택향교는 10철을 제외하고, 공자를 주향(主香)으로 중국의 4성(聖)과 송나라 때의 정이, 주희 등 2현, 우리나라 18현 등 25현(賢)만 모신 것이 특징이다. 위패를 살피던 중 내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조헌이 배향된 것에 의문을 제기하자 동행한 오세운 선생도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조헌이 배향된 것은 잘못된 배치가 아니었다. 조헌은 율곡의 제자로 의병장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학문적으로도 크게 성취한 인물로 고종 20년(1883)에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었다.

향교말에 사는 사람들

향교 입구의 선정비(善政碑)군을 둘러본 뒤 향교 말을 찾았다. 조선은 향교전(鄕校田)의 경작(향교노비가 담당하기도 했다)과 향교와 관련된 부역을 향교말에 부과하고, 대신 군역(軍役), 민고(民庫), 잡역(雜役) 등을 면제하였다. 향교말이 되기 위해서는 마을간에 계를 맺어야했기 때문에 계방촌(契房村)이라고도 하였다. 이들은 향교에 필요한 물품이나 계방전을 내야 했고, 관에서는 완문(完文)을 발급하여 증명해주었다. 향교말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 교보들도 있었다 교보는 향교에 속한 보인(保人)으로 군역을 면제받았다. 교보의 역할은 향교에 돈과 현물을 바치고 향교를 지키거나 심부름을 하는 일 또는 건물수리 때 노동력을 제공하는 일을 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군역면제를 위하여 뇌물을 주고 교보가 되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불법적으로 교보의 인원이 증원되기도 하였다. 향교말 사람들은 일반 백성들보다 역(役)의 부담이 적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특히 지방제도가 문란하고 사회구조의 변동이 급격히 진행되었던 조선 후기에는 지방 수령이나 유력자들에 의해 향교말의 사람들을 잡역에 동원하는 일이 허다했으며, 이로 인하여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향교말을 답사하다가 길을 가는 마을 노인 한 분을 붙잡고 향교말의 유래를 물었더니, "그냥 향교 옆이래서 그렇지 뭐"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그 말이 맞지만 향교 옆에 살았던 사람은 양반이 아니라 상민이나 천민이었다는 사실을 그 분이 알았다면 어떤 표정이 되었을지 궁금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양반 콤플렉스는 참 뿌리깊다. 일부 학자들은 조선 후기 일부지방에서는 명목상의 양반이 전체 주민의 70%가 넘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국가가 효율적으로 운영되려면 지배층이 숫자는 10%가 넘으면 안 된다. 가장 신빙성 있는 자료로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조사한 신분별 인구구성을 보면, 양반의 숫자가 가장 많았던 충청도의 경우도 10%를 약간 상회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 통계가 정확하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이 양반이 아니라는 사실에 콤플렉스를 느낄 필요가 없다. 눈이 두 개인 90%(천민 포함)의 사람이 눈이 한 개인 10%의 사람에게 콤플렉스를 느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공부 잘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좋은 세상을 만든 적이 내 기억에는 거의 없다. 그런데 우리가 굳이 양반자리 한 귀퉁이를 차지하려고 애쓸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차라리 나는 외치고 싶다. "상민(쌍놈)의 후예들이여, 당당하자. 당당히 우리는 쌍놈이라고 말하자"

<역사/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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