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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섶길 8코스 황구지길 이야기 3
평택시민신문 | 승인 2019.02.13 16:51

철장석선일심순국(鐵腸石膳 一心殉國)

창자는 쇠붙이와 같고 쓸개는 돌과 같아라. 그 마음 나라에 바쳤도다

지난해 9월 청북중학교 학생들이 황구지길을 걷고 있다.

[평택시민신문] 사업소 마을 어귀를 귀빗부리라고 한다. 여기서부터 금암3리 새말이다. 새말이라는 지명은 새로 생긴 마을 이라는 뜻인데 금암2리 안말이 600년 역사이니 400년인 금암3리는 그야말로 새말인 것이다. 귀빗부리라는 지명은 서탄면 북부전체 지형이 말물자 (勿)형상인데서 비롯된다. 마두리에서 사리까지 지형지세를 말의 형상으로 보는 것인데 마두리가 말머리이고 귀빗부리는 말의 귀쯤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금암1리는 골안말이라고 불리는데 말의 뱃고래에 해당되어 그렇게 불린다고 마을 사람들은 주장한다. 금암2리는 안말이라고 한다. 안말은 서탄면의 중심지다. 면사무소와 학교와 지서, 농협, 소방서들이 모두 안말에 자리하고 있다. 서탄의 상징인 북바위는 금암1리에서 사리쪽으로 들어가는 오산천변에 있다. 서탄의 상징물이라고는 하지만 이름에 걸맞지 않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평택섶길 8코스 황구지길 안내표시

북바위

북바위

옛날 홍수 때(1925년 을축대홍수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 동네사람이 이 바위에 올라 북을 쳐 홍수를 알렸다고 해서 북바위라 했다고 전한다. 전설은 그렇다 치고 필자는 이 바위를 금암리라는 마을 이름의 근거로 추측 하고 있다. 근처에 이만한 바위가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바위는 이른바 큰바우 즉 ‘곰바우’로 추측된다. 곰바우는 검(크다)바위로 되고 검은 금(金)바위는 암(岩)으로 변해 금암리가 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보전해야할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되는 바위인 만큼 새롭게 주목해야할 일이다.

금암3리 새말은 양지바르게 자리 잡은 청주한씨 양절공파 집성촌이다. 한온장군은 장흥부사로 1517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1555년 달랑진에서 왜구와 싸우다 전사했다. 이 마을에 충신정문이 세워진 것은 고종12년(1875)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숙종9년(1683)에 장흥민들이 충렬사를 세우고 봉사했다. 그 후 숙종 22년(1696) 애국충절을 기려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리고 충신정문을 장흥에 세웠다.

한온장군의 전사에 대해선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에도 등장한다. 홍명희 선생은 임꺽정의 눈으로 한온장군을 평가하는데 그가 용맹하고 돌파력이 강했다고 했다. 왜구의 기세에 눌려 주변 고을에서 지원을 꺼려 중과부적으로 전사했는데 그의 시체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몇 가지 기록들에서 그의 무용담이 전해 오는데 전라도 암행어사 윤수의 기록에 ‘장흥부사 한온은 마음을 다해 백성들을 돌보아 구제하였고’라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율곡은 5년 후 한장흥온후발문(韓長興薀後拔文)이라는 글을 통해 한온장군의 전투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그 모습은 흡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묘사되고 있다. 한 군졸이 성벽을 넘어 피신하는데 한온장군이 수백명의 왜적들에게 둘러싸여 큰칼을 번쩍이며 대항하고 있는 모습을 보아 전했노라고 기록한다. 율곡이 이렇게 까지 한온장군을 감싸는데는 이유가 있다. 한온장군의 전사에 맥없이 죽었다는 설과 도망쳤다는 설들로 설왕설래 했는데 이런 의혹들을 거두고 전사자에 대해 명예롭게 해야만 훗날 전장에서 나라에 충성으로 싸우게 될 것이라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로서 떠돌고 있는 한온장군에 대한 풍문을 잠재우고 포상을 할 것을 주청했다. 장흥사람 시인 백광온은 한온장군의 충의를 시로 적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고상안의 효빈잡기에서는 그가 살아서 도망쳤을 거라는 추측도 하고 있다. 논공행상의 이런저런 비린내들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한온장군 충신정문내에 현액

한온장군 충신정문내에 현액

양절공은 한확으로 중국통 외교관이다. 그의 누이 둘이 명나라황제의 비가 되었다. 성종의 어머니이며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가 그의 딸이다. 그의 묘는 능내리에 있다. 그의 묘로 인해 지어진 지명이다. 그만큼 권세가 큰 집안이다. 한온은 한확의 7세손이며 그의 외숙이 인조반정의 실세 박원종이다. 한온이 어렸을 땐 귀족출신 들만 다니는 학교를 다닐 정도로 집안으로 따지면 그만한 권세가도 없다. 그런데 그 집안이 새말로 낙향한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한온의 묘도 고양시 항동에 있는데 말이다.

평택시향토유적 3호인 충의공 한온정문은 금암2리에서 내천리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바로 마을 입구에 정문을 세웠는데 현판에는‘철장석선 일심순국(鐵腸石膳 一心殉國)’이라 쓰여 있다. 즉 ‘창자는 쇠붙이와 같고 쓸개는 돌과 같아라. 그 마음 나라에 바쳤도다.’

새말동네 마을 회관 앞에는 오래된 공동우물이 있었다. 우물이 제법컸다. 이곳에서 빨래를 하거나 물을 길어가기도 했는데 80년까지도 그대로 사용하던 우물이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우물가에 향나무 몇 그루가 인상적이었다. 마을 우물은 아낙네들의 모임장소다. 한길 옆에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다. 동네의 모든 이야기가 모여서 분석되고 재생산되어 확산 되는 곳이다. 동네에 낮선 사람이 왔는지 누구네가 밥을 굶는지 마을의 모든 사정이 드러나는 곳이다. 공동체가 유지되는 중요한 길목이다. 같은 물을 마시니 한 식구에 진배없고 안살림들이 속속들이 드러나는 곳이다. 지금은 없어진 과거의 유물이라고만 하면 재미없을 것이다. 우물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 우물같은 공간이 이 시대에도 필요하다.

새말을 지나 금암2리 면사무소 뒤편으로 오르면 산길이 나선다. 길 한 켠에 잘 정돈된 무덤들이 있는데 묘앞에 큰 바위가 잇다. 이를 두고 고인돌로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바로 여기서 500미터 떨어진 산줄기에 다수의 수월암리 고인돌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지금 고인돌은 경동보일러 정문 앞에 소공원 형태로 보존하고 있다. 고인돌이 있다는 것은 이 지역에 사람이 살아온 시기를 말해준다. 이 고인돌은 정확히 확인되진 않았으나 돌의 모습과 다듬어진 흔적 그리고 덮개돌 밑에 깔린 돌등으로 봐서 고인돌로 보인다. 서탄면이라도 표지판을 세워 훼손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라면 적어도 1만년에서 5천년이나 된 유적이다. 함부로 대할 일이 아니다. 서탄면 내에 내천리와 수월암리 지석묘가 그나마 서탄지역에 오래전에 사람이 살았던 것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게 할뿐이다.
 

금암리 고인돌

금암리 고인돌

서탄면주민자치위원회에서 개발한 매봉산둘레길이 면사무소에서 시작해 이곳에서 산길로 들어간다. 산길에서 잠시 서북쪽을 바라보면 수월암2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수월암2리는 거르미이다. 거르미는 거리미가 변한 말이고 이는 길거리라는 뜻이다. 한문으로 표현하면 道(도)인데 중첩을 해서 부르기도 좋고 뜻도 있게 만들어 도도리가 되었다. 그만큼 도도리는 길이 많았나 보다. 바로 내려다보이는 앞에 뒷거르미로 가는 고갯길이 돌팍재다. 어염을 이고지고 가던 사람들이 땀을 흘렸던 길이고 돌팍에 찢긴 짚신에 신갈나무 이파리라도 깔아야 걸을 수 있던 힘든 길이었을 것이다. 돌팍재 고개 바른편이 요새골인데 청일 전쟁시기 청군의 후방요새가 있어 그리 불렸단다. 지금도 토굴의 흔적으로 보이는 구덩이가 있는데 폭10여m 길이 30~40m로 제법 큰 구덩이다. 사람들이 요새굴이라 부른 것을 보면 군대가 구덩이를 파고 막사를 지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역사의 현장이니 만큼 표지판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1980년 산지개발이 되기 전에는 이곳에 숲이 깊어서 간뎅이 작은 사람은 범접도 못했다고 한다. 도도리 공동묘지가 있기도 하고 애장터도 있었단다. 또 청군이 죽어간 곳이기도 해서 비라도 올라치면 귀곡성이 들리기도 했다고 어른들은 전한다.
 

요새굴 흔적

요새굴 흔적

안말 방죽에 피어난 연꽃을 보면서 낚시 삼매경에 빠진 이들을 힐긋 거리며 매봉산을 오른다. 매봉산 정상에는 체육시설이 갖추어져있다. 우리나라 지명에 매봉이라는 지명이 유독 많이 있다. 이는 매봉에서 매를 훈련하는 것과 관련이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선비들의 호사취미로 매를 기르고 훈련시키는 것이 요즘으로 말하면 스포츠 같은 것이었다고 하니 매를 날리는 곳이 매봉이 아니겠는가. 또 하나는 산을 뫼라고 하는데 우리말은 같은 의미를 갖는 말을 이중으로 사용해 하나의 의미를 지니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뫼도 산이요 봉도 산이다. 따라서 그냥 산이라는 말 보다 뫼봉 이라고 불러 산을 표현했다고 본다. 뫼봉이 매봉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매봉은 서탄의 주산이다. 서탄초등학교 교가에도 나오는데 매봉에서 갈라지는 산줄기들의 언저리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들이다. 그리고 산과 산의 언저리를 연결한 것이 길이 되었다. 때로는 높은 고개를 넘기도 해서 길은 늘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연결되고 그 길을 통해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곤해서 자식들을 길러냈다. 멀리 수원 광교산에서 오산 독산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오산 세교동을 거처 서탄면으로 흘러 매봉을 이루는 것이다. 이 산줄기는 동으로 오산천 서로 황구지천을 끼고 흘러 진위천을 만나면서 맥을 다하고 만다.

한도숙
전국농민회 총연맹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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