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 떨군 서러움은 민들레를 닮아있다

그들은 살기위해 강을 건너 꿀꿀이죽을 끓였고

논둑길을 내달려 남의 농사를 지었고

그들의 길에는 눈물이 떨어지고

때로는 한숨으로 얼룩지고,

때로는 분노의 주먹을 쥐고 내달리던 길이었다

이륙사의 폐가

[평택시민신문] 진위천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은 미군기지요 왼쪽은 회화리다. 회화리는 홰나무가 있어 홰쟁이라 불렸다가 회화리로 되었다. 회화리 들판은 해쟁이뜰이라고 불린다. 해쟁이 뜰을 비롯한 이륙사뜰 들이 모두 진위천과 황구지천의 습지였다가 역둔토(驛屯土)가 된듯하다. 지금도 문서에 역둔토의 흔적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회화리가 역은 아니었다. 역의 경비를 조달하는 측면에서 경작하던 땅들이었다. 그러다가 임금으로부터 불하(또는 근수)를 받은 재력가들의 힘에 의해 농토로 거듭났다. 농민들은 기왕에 짓던 땅도 임금의 불하라는 이름으로 편취당하고 이들의 소작농으로 근근히 살아가야 했다. 재력가들은 대부분 임금의 친인척이거나 중앙정치를 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농민들을 부려 둑을 쌓고 농사를 짓게 한 것이다. 그러다가 정조대에 화성 현륭원의 본절로 용주사가 지어지자 이 땅은 용주사가 소작을 거두는 땅이 되었다. 떠다니는 말로는 소작을 거두어들이는 용주사 말사가 있어 중이 거주했다고 한다. 일제 때는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이 땅을 거두어 일인들에게 나누어주어 농사를 지었고 사금광산과 함께 그것을 지키는 파출소를 회화리에 두었다고 한다. 해쟁이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한계점이라 한다. 따라서 해쟁이 들은 바닷물 피해가 없어 농사가 잘됐었다고 한다.

해쟁이뜰 아래쪽 들은 벌터라고 하는데 벌터보다는 이륙사라고 흔히 불렸던 곳이다. 마두리 264번지 일대라서 그렇게 불렸는데 이는 이 마을이 홍수피해를 자주 보는 곳이라 마을 이라고 할 수도 없다는 의미에서 마을 이름이 지어지지 않은 것이다. 하필이면 저항시인 이육사와 이름이 같다. 여기 농민들의 삶이 육사가 외쳤던 ‘광야’일 수도 있고 ‘빼앗긴 땅’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빼앗긴 땅을 향한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은 육사와 다르다고 하기 힘들다.

회화리 교회

 

이륙사 가는 길

질척이는 길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두더지처럼
그들에게 허용된
좁고 질척이는 길 끝 이륙사가 있었다
바닷물에 숨통을 내맡긴
검은 개흙 간사지에
피죽을 끓여도 도망칠 순 없었다
가르마 같은 논길이 아니더라도
시인 육사의 찟긴 가슴으로
구부러진 허리
그것 닮은 논두렁 만들고 땅을 기뤘다
십여 호 농투산이
말머리 사람들 눈총
지주와 돈 앞에 무력함과
해마다 덮치는 물난리
그것이 육사의 옥살이보다
못하지 않았다
21세기 자본농이 이룩사에 들어오고
이룩사 피눈물의 흔적은 없다
마을 이름도 없는 그냥
공구리 포장 곧게 뻗은
마두리 264번지.
이륙사라고 했다

 

1990년 즈음하여 마을 사람들이 홍수피해가 없는 마두리 쪽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의 맥이 끊이는가 싶었는데 이후 홍수로부터 안전지대로 변하자 요양원과 몇 가구가 입주해 살고 주변엔 목장이나 시설하우스들이 들어서 마을의 명맥을 이어주고 있다. 지금도 홍수와 바닷물과 싸우던 그네들의 삶을 증명이라도 하듯 쓰러져가는 옛집들이 몇 채 남아 을씨년스럽다. 이들이 간척한 논들에는 눈물과 땀이 범벅이 되어있다. 이들의 삶을 연결한 길은 좀 더 높게 쌓은 제방인데 말머리 동네로 이어져 삶의 질긴 끈을 이었다.

홰쟁이 마을은 100년이 훌쩍 넘은 교회가 있다. 그만큼 마을의 역사도 이제 100년을 넘겼다. 처음 동척이 들어왔다가 사금이 나오는 바람에 광산이 형성되어 어느 곳보다 전깃불이 먼저 들어온 마을이라고 한다. 그만큼 이 마을 사람들의 역사는 수탈에 시달린 역사일거란 추측이다. 오래전 이 마을에 임씨성을 가진 분이 이웃한 야막리에 수진농조 조합원이었던 모양이다. 그분은 당신의 고초를 가끔 말씀하셨는데 늘 몸조심하라며 농민회 활동을 격려하시곤 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당시 구술을 받아두고 싶었는데 그리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굽이굽이마다 틈만 있으면 들어가 씨를 퍼트리는 민들레를 닮아있다. 길가에 핀 민들레가 비록 남의 땅에서 날아온 민들레 이지만 민들레처럼 들판을 덮는 식물도 많진 않다. 한 과 설움과 눈물이 만들어낸 사람들의 역사는 아마도 길 위에 떨군 땀방울이나 눈물방울이 변해 민들레가 되었을 성싶다.

눈물의 삶에서 마두2리도 빠지면 서운타 할 것이다. 회화리 교회 옆 ‘예술가집’ 벽을 끼고 돌면 마두2리 사업소로 가는 들판이다. 이 마을은 한국전쟁 중에 피난민들이 정착하며 생긴 마을이다. 피난민들의 일거리를 제공해주는 사업소가 있어 마을 이름도 사업소이다. 그야말로 마을 사람들은 허름한 판자에 의지하고 농사를 지었는데 그 시절이 그렇듯 미군부대에서 허드렛일자리라도 구한 사람은 그나마 살림이 나았다고 한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잔반을 (이를 짬밥이라고 불렀다) 불순물은 걸러버리고 그걸 끓여서 먹었는데 ‘꿀꿀이죽’이라고 했다. 이 마을사람들이 거의 그걸 얻어다 먹고 죽지 못한 삶을 이어 왔다고 했다.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을 두고 온 사람들이라서 악착 같이 일했고 필자의 과수원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은 이 마을 사람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마을 사람들이 참으로 고맙다. 돈을 주고 품을 사는 것이기는 해도 일손이 모자라면 이곳저곳에서 불러가기에 내 집으로 오라하기가 쉽진 않았는데 일의 순서를 조절하며 일을 맞춰준 것이 고마운 일이다. 어느 농촌이나 마찬가지지만 이제 80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라서 거리에서 마주쳐도 잘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늙어버렸다.

마두2리 사업소(피난민들의 일거리를 제공함)

사업소의 길은 명줄을 이어내는 길이였다. 죽음을 피해 따라온 길이 마두리 한구석에 닿았고 또 그들은 살기위해 강을 건너 꿀꿀이죽을 끓였고 논둑길을 내달려 남의 농사를 지었다. 그것은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이 아니다. 누구나 똑같이 가야하는 길이고 만들어가는 길이다. 그들의 길에는 눈물이 떨어지고 때로는 한숨으로 얼룩지고 때로는 분노의 주먹을 쥐고 내달리던 길이었다. 그들이 길 위에 떨군 서러움은 봄이면 노오란 민들레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민들레는 그들의 한숨 섞인 노래를 닮아있다.

글: 한도숙 전국농민회 총연맹 고문


 

*근수(折受)임금이 땅을 내어주는 것

*동양척식주식회사:1908년 일제가 한국의 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하여 한국에 설립한 국책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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