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팅힐’을 보다

[평택시민신문] 인생은 한 방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로또에 당첨되고 우연히 샀던 땅이 열배 스무 배 뻥튀기하는 것이 인생이라고들 말한다. 한 때 신데렐라를 주제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부딪친 남자와 눈이 맞아 사귀었는데 재벌 2세였다’더라는 스토리 말이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큰 딸 이부진씨의 결혼도 남자판 신데렐라 스토리다. 복지단체에서 함께 봉사활동을 하다 만난 삼성그룹 평사원과 사랑을 하고 상상할 수 없는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골인했다는 감동스토리는 최근까지 인구에 회자되었다. 나도 감동받았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이부진이라는 여성을 다시 봤다. 하지만 얼마 전 감동스토리의 주인공 임우재부사장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세간에 알려진 스토리는 가짜이며 자신은 이건희회장의 경호원 출신이었다는 고백이다. 평범한 사람이 재벌가와 결혼했을 경우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알고 결혼을 꺼렸다고도 말했고, 재벌가의 사위로 산다는 것이 그리 녹록치 않았다는 말도 했다. 그렇다면 뭔가. 어쩌면 둘의 결혼에는 우리가 모르는 스토리, 예컨대 이건희 회장을 그림자처럼 경호하던 임우재씨를 보고 반한 이부진씨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강행한 이야기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1998년 개봉한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감독 이은)’은 신데렐라 이야기다. 의경이었던 범수(임창정)와 배우지망생이었던 현주(고소영)의 만남은 특별할 것 없는 흔한 우연이었지만, 범수가 전역 후 프로야구 심판이 되어 마주친 현주는 당대 최고의 스타 배우였다. 서로의 애틋함은 여전했고 연예인의 인기와 미모를 돈으로 사려는 재벌들과는 질 적으로 차이나는 감정이었지만 둘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강물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은 감독은 둘의 관계를 해피앤딩으로 처리했다. 흡사 평등사회의 이상을 보여줬던 춘향전의 결말처럼 결코 현실에서는 쉽게 이뤄지지 않는 일을 영화를 통해 실현시켰다.

노팅힐은 영국 런던에서도 가장 안전하고 아름다운 동네라고 한다. 마을 전체에 깔려 있는 돌길과 거리 양 옆의 빅토리아식 테라스 하우스의 로맨틱한 풍경, 특색 있는 카페들과 노팅힐 카니발로 로맨스 영화의 단골 배경이 되고 있다. 로저 미첼 감독도 이 도시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었다.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가 주연한 영화 ‘노팅힐(1999)’이 그것이다.

영화는 노팅힐의 거리풍경을 먼저 보여준다. 전통시장과 주말에 열리는 거리상점들, 빅토리아 테라스를 갖춘 주택들, 카페와 서점. 그곳에서 서민들의 평범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 변변치 않은 요리 솜씨로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미끄러져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여자, 여러 가지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결혼도 못한 노처녀, 증권회사에 다니는 능력 없는 남자, 사이코 기질이 다분한 무명 예술가, 레스토랑을 열었다가 망해버린 남자. 윌리엄 데커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거리 구석에서 여행전문 서점을 운영하지만 매 달 적자에 시달리고,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집까지 장만했지만 다른 남자와 바람나 달아나 버렸으며, 권태로울 만큼 하루하루의 삶에 변화와 새로움이 없는 삶. 그런데도 그들은 불평하지 않고 서로 보듬으며 격려하면서 힘차게 살아간다.

평범했던 노팅힐 사람들의 삶은 세계적인 배우 안나 스콧이 개입되면서 요동친다. 기습적으로 키스를 당한 데커는 애써 평범한 일상 속으로 돌아오려 하지만 운명의 끈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안나 스콧도 지극히 평화롭고 행복한 노팅힐 사람들의 일상을 경험하고는 그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해 허덕인다. 이 관계에서는 분명 데커가 우위에 있다. 그는 결코 안나 스콧의 화려함과 부와 명예 속에 자신을 가둬둘 생각이 없지만 안나는 노팅힐의 삶을 그리워한다. 객관적으로는 분명 엇나갈 수밖에 없는 조합인데도 영화는 어떻게든 둘을 결합시키려 애쓴다. 그리고 그 노력은 성공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안나 스콧은 데커와 결혼에 성공하고 노팅힐의 일상에 연착륙한다. 평화롭게.

영화 노팅힐은 이은 감독의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과 닮았다. 스토리 전개도 그렇고 가치관이나 말하려는 내용도 비슷하다. 이은 감독의 작품이 한 해 빨랐으니 로저 미첼 감독이 베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신데렐라를 꿈꾸는 사람은 도처에 널렸고, 그런 주제로 영화나 연극을 만드는 작가나 감독들도 수 없이 많으니 말이다. 영화는 작품성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30대 초반의 줄리아 로버츠와 30대 후반의 휴 그랜트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을 준다. 나는 줄리아 로버츠를 떠올리면 큰 코와 입 밖에 생각나지 않는데 그가 이처럼 매력적일 줄 몰랐다. 휴 그랜트의 매력을 재발견한 것도 기쁨이다. 사람의 매력이라는 것이 과도한 액션 없이도 충분히 어필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보여준다.

영화를 보며 이부진의 남편 임우재를 떠올렸다. 결혼 후 한 번도 행복한 적 없었다는 그의 항변, 재벌가의 사위노릇하기가 정말 힘들었다는 고백. 재벌가의 구색에 맞추느라 되지도 않는 공부를 억지로 해서 MIT공대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그 때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으로 기억하는 사람. 임우재를 생각하며 안나 스콧과 결혼한 데커를 떠올렸다. 명문가의 자제 이몽룡과 결혼한 천출 성춘향을 떠올렸다. 재벌3세와 결혼해서 세상의 부러움을 받다가 돌연 이혼당하고 아들딸조차 만나지 못하고 사는 고현정이 생각났다. 그들은 행복했을까? 분수에 맞춰 격에 따라 살라고 조언해줄까, 아님 불평등한 세상 싹 갈아엎어 버려. 신데렐라도 참 행복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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