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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샘의 좌충우돌 교토여행기(6)일본을 이해하려면 신사를 알아야 한다
평택시민신문 | 승인 2018.10.10 09:52|(931호)

[평택시민신문] ‘가깝지만 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일본. 위치상으로는 가까이 있지만, 오랫동안 이어져온 역사‧문화적 갈등으로 우리는 일본 그대로를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도 “40여년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쳤지만 일본을 너무 몰랐다는 반성이 가슴을 찔렀다”고 고백하며, 일본 교토로 자유여행을 다녀왔다. 역사와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돌아본 이번 교토여행을 통해 “일본에 대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다”는 김해규 소장. 한광중학교 역사 교사이기도한 그의 ‘좌충우돌 교토여행기’를 <평택시민신문>은 연재하며, 일본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구한다.

야사카신사 본전

고구려 도래인의 정신적 거처 야사카신사

법관사 오중탑에서 야사카신사는 지척이다. 닌넨자카와 야사카신사 사이 골목에는 번잡한 식당이나 카페가 거의 없다. 야사카 신사 남문으로 들어갔다. 일본에는 누문이나 회랑에 주황색 단청이 많다. 근래의 방식인지 본래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적한 풍경을 선호하는 우리정서와는 맞지 않는다. 우리에게 신사(神社)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다.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걸핏하면 2차 대전의 전범(戰犯)을 모신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신사(神社)는 정령신앙에서 출발했고 이것이 조상신이나 마을신 숭배, 현세 이익적 성격으로 변했다. 그래서 일본을 이해하려면 신사(神社)를 알아야 한다.

야사카신사는 마루야마 공원 앞에 있다. 이곳에서 기온거리가 시작된다. 야사카신사는 656년 고구려 사신 이리지가 신라 우두산의 스사노오노 미코토(소잔오존)을 모셔오면서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이 스사노오노 미코토를 고즈텐노(우두천황)라고 하고 고즈텐노는 ‘기온’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메이지유신 전까지 야사카신사를 기온신사라고 하였다. 기온이 야사카로 바뀐 것은 1868년 신불분리정책부터다. 고구려 사신으로 일본에 정착한 이리지가 천황으로부터 ‘야사카노 미야츠코’라는 성(姓)을 하사받았는데 그의 성(姓)을 따라 바꾼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고 신관(神官)도 이리지의 장남 마테의 후손들이 맡았다고 한다.

야사카신사 배전

일본인들은 야사카신사를 많이 찾는다. 제액과 화를 막아주고 상업을 번창시키는 효험이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야사카신사는 기온의 본사와 전국의 3000여개 씨사로 형성되었다. 본전은 1654년에 건립했으며 안에는 20여 개의 섭사가 있다. 섭사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역병(疫病)을 물리치는 에키신사다. 이 신사에서 일본의 3대 마쓰리 가운데 하나인 기온 마쓰리가 시작되었다. 뜨겁게 내리 쬐는 한여름에도 야사카신사는 사람들로 붐빈다. 배전 안에는 기온 마쓰리 때 사용하는 가마와 복을 기원하는 무수히 많은 등이 걸려 있다. 배전에 앉아 본전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일본인들이 헌금통에 동전을 던져 넣고는 줄을 당겨 기도를 올린다. 기도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일본인들의 삶 속에서 신사가 갖는 의미는 깨달을 수 있었다.

 

헤이안교 건설과 도지(東寺), 그리고 공해스님

야스카신사 서문을 나서면 기온거리다. 기온거리는 상점 앞에 회랑과 같은 차양막을 쳐서 햇볕을 피할 수 있게 했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모르겠지만 참 고맙다. 기온거리 중간쯤에 미술관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관람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사람들 틈에 끼어 걷다가 그만 지나쳐버렸다. 그렇다고 기요미즈테라를 보고 실망한 터에 은각사와 철학의 길을 답사하기도 내키지 않았다. 마땅히 갈 곳도 없어 카페에 들어가 시원한 차 한 잔을 마시는데 ‘동사(東寺)’라는 글씨가 선명한 시내버스가 지난다. 첫날 길을 잃어 헤매다가 답사하지 못했던 그 동사(東寺)다. 부리나케 뛰어나가 버스에 올랐다.

도지의 남대문과 해자

도지(東寺)는 철로 동쪽 미니미구에 위치한다. 지금은 평택시 원평동 같은 분위기지만 간무천황이 헤이안교를 건설할 당시만 해도 황궁에서 남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은 주작대로의 동쪽에 위치했다. 그래서 절의 이름도 도지(東寺)다. 도지(東寺) 동문 앞 버스정거장에서 내려 남대문까지 걸어가서 답사를 시작했다. 고대 일본의 사찰들은 남대문에서부터 금당, 강당이 차례로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남대문은 단층이지만 육중하고 묵직했다. 문밖에는 도성이나 읍성(邑城)에서나 볼 수 있는 깊은 해자까지 파 놓았다. 남대문 우측에는 ‘진언종 총본산’이라는 빗돌이 세워져 있어 이곳이 헤이안시대를 주름잡았던 진언밀교의 뿌리임을 알게 했다.

도지(東寺)는 823년 황명(皇命)에 따라 당대 고승 홍법대사 공해가 창건했다. 통치 목적에서 창건되다보니 정치색이 짙고 이름도 ‘교왕호국사’로 불렀지만 공해스님의 법력이 출중한데다 대중포교와 구제에도 힘을 써 지배층과 대중 모두에게 호응을 얻었다.

도지 오중탑

도지(東寺)의 상징은 뭐니 뭐니 해도 오중탑이다. 오중탑은 건립 후 네 차례나 벼락을 맞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 때마다 복원했는데 현재의 것은 에도시대 초기에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오중탑은 내부의 탱화가 유명지만 개방은 1년 중 단 며칠 뿐, 나에게는 혜택이 주어지지 않았다. 사찰 안에는 국보급 문화재가 많다. 가장 유명한 것은 금당의 약사삼존상과 강당의 입체만다라다. 입체 만다라는 도지(東寺)가 밀교계통인 진언종의 본산임을 알게 할 뿐 아니라 1200년 전 공해스님이 펼치려했던 불교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한다.

시간이 늦어 보물전은 답사하지 못했다. 매월 21일 홍법대사 공해의 서거를 추모하여 열린다는 ‘고보상’이라는 벼룩시장도 날짜를 맞추지 못해 체험하지 못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공해스님이 지었다는 ‘이로하(伊呂波) 노래’를 읽는다. “꽃은 화려해도 지고 마나니, 우리의 인생살이 누구인들 영원하리.”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노래한 시(詩)다.

송나라의 영행을 받았다는 도지의 금당

 

교토에서 만난 송몽규와 윤동주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늦은 저녁을 먹었다. 메뉴는 일본라멘. 마침 숙소 근처에 유명 라멘집이 있다기에 갔더니 늦은 시간인데도 10여 미터나 줄이 서 있다. 줄서기의 무료함을 달랠 겸 뒷줄의 젊은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냐고 물었더니 싱가포르에서 혼자 자유여행을 왔으며 직업이 중학교 영어교사라고 술술 말한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대화가 깊어질수록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많아졌고 급기야 내 밑바닥 영어실력이 드러났다. 너무 당황스러워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아, 귀국하면 영어공부 해야지!’

다음날 늦잠에서 일어나 간단히 요기만 한 뒤 길을 나섰다. 오늘 일정은 교토대학과 도시샤대학을 답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가와라마치역 근처에서 다행스럽게도 교토대 학생을 만나 무사히 학교 앞에서 하차했다. 교토대는 일본에서 두 번째로 개교했고 도쿄대 다음으로 명문이다. 또 이공계통의 학문적 성과가 대단해서 노벨상 수상자만도 10명이나 배출했다. 이곳은 윤동주의 사촌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송몽규의 모교다. 일찍이 북간도 용정에서 자라 민족의식이 남달랐던 열혈 청년은 중학교 시절 김구의 주선으로 중국 육군군관학교에 입교했었고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는 윤동주와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며 문학 활동을 했다. 송몽규는 교토대 사학과 재학시절 ‘재 교토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 사건’으로 체포되어 3년형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던 중 해방 직전 감옥에서 사망했다. 우리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인물이지만 교토대 교정에서는 그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송몽규의 모교 교토대

지도상으로 교토대와 도시샤대학의 거리는 두 블록. 하지만 정수리에서부터 새끼발가락까지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위는 두 블록마저 아득하게 했다. 가모대교를 건너자 좌측에는 천황이 거주했다는 교토고쇼가 보이고 우측에 ‘도시샤(同志社)’라는 팻말이 나타났다. 다 왔구나 싶어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더니 일반인 출입금지라며 경비가 제지한다. 내가 들어가려고 했던 곳은 유아원, 도시샤재단이 유아원에서부터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운영한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대학교 정문 경비는 ‘윤동주’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시비(詩碑) 위치를 가르쳐준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관광객이 찾았던 결과일 것이다.

도시샤대학 구내 윤동주 시비
글: 김해규(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경비의 말을 듣고 시비(詩碑)의 행방을 찾았지만 오랫동안 헤맸다. 할 수 없이 서문 경비에게 다시 물었더니 손가락으로 코앞을 가리킨다. 시비(詩碑)는 서문 근처 화단에 평소 존경했고 영향 받은 정지용의 시비(詩碑)와 나란히 있었다. 정지용의 시(詩)는 그가 유학시절 즐겨 산책했던 ‘압천(鴨川, 가모강)’이며, 그 옆의 윤동주 시(詩)는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서시(序詩)’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입새에 이는 바람에도 슬퍼했던’ 민족청년의 고뇌가 담긴 시(詩)다. 윤동주의 시비(詩碑) 답사로 3박 4일 간의 교토여행을 마쳤다. 교토역에서 서둘러 간사이공항으로 가는 JR하루카 특급을 탔다. 차창 밖 풍경이 첫날과 사뭇 다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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