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 문화유산 원형의 아름다움을 전승시킨 분들에게 감사했다

[평택시민신문] ‘가깝지만 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일본. 위치상으로는 가까이 있지만, 오랫동안 이어져온 역사‧문화적 갈등으로 우리는 일본 그대로를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도 “40여년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쳤지만 일본을 너무 몰랐다는 반성이 가슴을 찔렀다”고 고백하며, 일본 교토로 자유여행을 다녀왔다. 역사와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돌아본 이번 교토여행을 통해 “일본에 대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다”는 김해규 소장. 한광중학교 역사 교사이기도한 그의 ‘좌충우돌 교토여행기’를 <평택시민신문>은 연재하며, 일본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구한다.

산주산겐도 전면

산주산겐도: 일본문화가 축소지향적이라고?

도후쿠지에서 산주산겐도는 전철로 딱 한 정거장. 지하에서 올라오자 뜨거운 열기가 밀려든다. 산주산겐도는 11세기 후반 건축물이다. 11세기는 천황이 상황으로 물러 앉아 ‘원정’을 펼쳤던 시기다. 산주산겐도는 고시라카와 상황이 천황으로 있을 때 측신 다이라노 기요모리에게 명하여 세운 사찰이다. 그래서 정치적 색채도 강했고 이름도 연화왕원이었다. 산주산겐도는 연화왕원의 본당이다. 나머지 건물은 불에 타거나 훼철되었다.

산주산겐도는 정면만 33칸, 좌우 길이만 118m나 된다. 실로 장대하다. 관음보살은 33가지로 변신하여 중생을 구제한다고 했는데 33칸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법당 안에는 본존불인 장육관음상을 중심으로 1000분의 천수관음상과 28부중상이 모셔졌다. 이들 불상은 1249년 화재로 소실될 위기에 처했을 때 스님들의 노력으로 본존불의 머리와 손 일부, 천수관음 156구, 28부 중상이 구출되어 이것을 토대로 1251년에 복원했다.

산주산겐도 뒷면

산주산겐도는 국립교토박물관 건너편에 있는데다 교통이 편리하여 관광객이 많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횡으로 쭉 뻗은 마루에 1028분의 불상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사전학습을 했지만 입이 쩍 벌어질 만큼 충격적이다. 관음은 본래 여성이다. 하지만 이곳의 불상들은 남성적, 여성적 요소를 두루 갖췄고 지적이면서도 우아하다. 조각기법이나 표정의 디테일도 뛰어나다. 우리는 중국문화의 장대함에 놀라고, 축소지향적이며 디테일이 강한 것을 일본문화의 특징이라고 말하는데 산주산겐도의 천수관음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훨씬 뛰어 넘는다.

밖으로 나와 산주산겐도를 한 바퀴 돌았다. 문외한의 눈에도 건축적 완성도가 숨 막힐 만큼 완벽하다. 산주산겐도를 답사하며 감사했다. 귀한 문화유산을 내부까지 공개한 것도 감사했고, 원형의 아름다움을 후대까지 전승시킨 분들에게도 감사했다. 일반적으로 수천 년 전의 문화유산이 원형대로 보전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오랜 세월 누군가의 땀과 장인적 정성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산주산겐도는 그것을 깨닫게 한다.

오랫동안 불상 감상에 집중한 탓에 머리가 어찔하다. 불상 뒤편 긴 툇마루를 걸으며 천수관음에 담긴 고시라카와 상황의 꿈과 욕망을 떠올렸다. 그는 왜 여러 부처님들 가운데 천수관음을 택했을까. 중생들의 소원을 모두 들어줄 수 없어 1000개의 손을 갖고 있다는 천수관음을 통해 그가 이루려던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걸핏하면 국민을 위한다면서도 정작 정치적 욕심만 채우려는 우리시대 정치인들과 그는 무엇이 다를까.

 

기요미즈테라는 빛 좋은 개살구

교토국립박물관 앞에서 기요미즈데라(청수사)로 가는 버스를 탔다. 교토에 와서 처음 타는 버스다. 버스 안에는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그들 대부분은 기요미즈테라를 간다. 기요미즈테라 뒷길로 산을 오른다. 산 전체가 묘지로 가득하다. 나는 우지의 뵤도인에 갔을 때만 해도 사찰에 묘지가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도 명부전을 짓고 납골묘를 운영하는 사례가 있지만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사찰묘지를 본적이 없다. 일본 사찰들이 묘지를 운영하는 것은 불교와 밀착된 민중들의 삶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사찰 운영을 위한 기금조성을 위해서라고 한다. 이렇게라도 수입을 얻지 못하면 사찰을 운영할 수 없다는 말이다.

기온지역은 고대(古代) 고구려 도래인들의 거주지다. 고구려 도래인들은 교토 남쪽 모모야마 일대에 많이 정착했는데 그 가운데 일부가 기온으로 이주했다. 기온에는 고구려 도래인을 모신 야사카신사를 비롯해서 기요미즈테라, 법관사와 같은 유적이 있다. 유홍준은 기요미즈테라를 ‘교토 답사 1번지’라고 했다. 교토 최고의 명소라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교토 관광객들은 기요미즈테라를 빼 놓지 않는다.

기요미즈테라 오르는 언덕의 묘지들

기요미즈테라는 8세기 후반 백제계 도래인의 후손 사카노우에노가 창건했다. 사카노우에노는 간무천황(781~806) 시기 에조족(아이누족) 정벌에 공을 세워 최초로 정이대장군(쇼군)에 봉해졌다. 그는 22세 때 임신한 부인을 위해 살생했던 것을 뉘우치고 옌친스님과 함께 기요미즈테라를 창건했다. 창건 당시만 해도 기요미즈테라는 작은 사찰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AD801년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사세를 크게 확장했다. 기요미즈테라는 1467년 오닌의 난 때 모두 불탔다. 현재의 것은 1633년에 복원된 것인데 원형을 잘 살려 본래의 것과 별 차이가 없다.

기요미즈테라는 ‘청수의 무대’와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약수’, 그리고 야사카신사 방면으로 나가는 산넨자카, 닌넨자카 거리가 유명하다. 관광객들 중에는 중국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깃발을 들고 패키지여행 온 일본인들도 제법 있었다. 일본인들에게도 기요미즈테라는 꼭 한 번 다녀가야 할 답사일번지인 셈이다. 여행오기 전 교토여행에 경험이 많았던 친구가 기요미즈테라에 가면 사람에 치어 죽는다며 말렸던 이유를 알겠다. 지극히 실망했지만 그래도 ‘청수의 무대’는 봐야겠기에 매표를 하려고 했더니 가림막을 치고 보수공사 중이다. 그래서 돌아서려는데 안내원이 들어가라며 권했다. 공사 중에도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놓아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하도 기가 막혀 얼굴만 빤히 쳐다보다가 얼른 돌아섰다.

보수공사 중인 기요미즈테라의 청수의 무대

법관사 오중탑이 훨씬 낫다

산넨자카를 거쳐 닌넨자카로 내려왔다. 넘어지면 3년씩이나 재수가 없다는 산넨자카 언덕에는 오래된 기념품 가게와 식당들로 가득하다. 번잡함이 싫어 닌넨자카 골목으로 들어서니 조금 한산하다. 새롭게 개발되는 서울의 서촌 골목들도 이랬으면 좋겠다. 닌넨자카나 기온거리 같은 전통 골목에서는 기모노를 입고 활보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난다. 대부분은 중국인들이지만 한국관광객도 제법 많다. 닌넨자카 골목에서 진짜 게이샤를 만났다. 기온에서도 게이샤를 만나기는 쉽지 않아서 염치불구하고 사진기를 갖다 댔다. 게이샤는 ‘예기(藝妓)’ 또는 ‘예자(藝者)’라고 한다. 유녀(遊女)라고도 부르는데 본래는 ‘예술을 하는 고급기생’이라는 의미다.

닌넨자카 골목을 헤매다 법관사 오중탑을 만났다. 사실 기요미즈테라 답사 때 꼭 보고 싶었던 탑이다. 법관사 오중탑은 주택가 골목 안에 있었다. 법관사는 야사카신사와 함께 고구려 도래인들의 사찰이다. 처음 교토 남쪽 카미코마에 정착한 고구려인들 중 일부가 기온의 야사카노 츠쿠리로 이주했는데 이들이 야사카신사와 법관사를 중심으로 마을을 이뤘다. 그래서 옛날에는 법관사를 야사카탑이라고도 불렀고, 야사카신사는 기온사라고 하였다.

야사카신사에 걸린 기증자들의 등

법관사 오중탑은 교토타워가 세워지기 전까지만 해도 교토의 상징이었다. 과거 막부시절에는 교토를 점령한 세력이 오중탑에 깃발을 꽂아 승리를 알렸다고 한다. 오중탑 현판 옆에 ‘성덕태자어건립(聖徳太子御建立)’라는 글씨가 있고 반대편에는 ‘일본최초지보탑(日本最初之寶塔)’이 새겨져 있다. 해석하면 법관사는 성덕태자(쇼토쿠태자)가 발원한 사찰이며 탑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건립되었다는 말이다. 법관사 오중탑은 익산 미륵사지 7층 석탑을 빼닮았다. 어쩌면 소실된 미륵사지 목탑도 저와 같았을 것이다.

점심때가 지나 법관사 오중탑 바로 앞의 2층 식당으로 올랐다. 1000엔 내외의 저렴한 덮밥을 파는 가게다. 유명하다는 장어덮밥을 시키려다 좀 더 저렴한 돼지고기 덮밥을 주문했다. 창문 너머로 오중탑을 감상하는데 밥이 나왔다. 밥은 퍼석했지만 동파육처럼 두툼하고 짭조름하게 양념된 돼지고기가 일품이다. (계속)

 

법관사 오중탑

 

글: 김해규(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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