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후쿠지 사찰, 성일스님 초빙해 절 짓고 사세 확장하며 유명세

[평택시민신문] ‘가깝지만 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일본. 위치상으로는 가까이 있지만, 오랫동안 이어져온 역사‧문화적 갈등으로 우리는 일본 그대로를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도 “40여년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쳤지만 일본을 너무 몰랐다는 반성이 가슴을 찔렀다”고 고백하며, 일본 교토로 자유여행을 다녀왔다. 역사와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돌아본 이번 교토여행을 통해 “일본에 대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다”는 김해규 소장. 한광중학교 역사 교사이기도한 그의 ‘좌충우돌 교토여행기’를 <평택시민신문>은 연재하며, 일본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구한다.

도게교와 아라시야마

한반도 도래인의 거처 아라시야마

일본 관광지에서는 신용카드를 잘 받지 않는다. 대부분 현금을 요구하기 때문에 돈이 떨어지면 무척 불안하다. 사찰 입장료가 비싼데다 선물용 차(茶)까지 구입하고 보니 뵤도인에서 현금이 달랑거렸다. 불안한 마음으로 전철을 타고 아라시야마로 이동했다. 아라시야마는 고대 한반도 도래인들의 정착지인데다 교토에서도 최고 명승지여서 관광객들이 무척 많다. 관광객들은 도게교(도월교)와 정원이 아름다운 텐류지(천룡사), 지쿠린이라고 부르는 대나무숲 그리고 가쓰라강 일대를 관광한다. 나는 지쿠린 대신 하타씨를 모신 마쓰오신사를 일정에 넣었다. 마쓰오 신사에는 도래인 하타씨가 사케라고 부르는 일본 청주의 신(神)으로도 숭배된다.

아라시야마역에서 하차하여 텐류지(천룡사)로 향했다. 분지지형인 교토는 일본 내에서도 습하고 덥기로 유명하다. 15분쯤 걷자 ‘임제종 대본산 천룡사’라는 빗돌이 나타났다. 풍광은 수려했고 기모노를 입은 관광객들은 무시로 문턱을 넘나들었다. 텐류지 정문 앞에서 더위에 지쳐 주저앉았다. 선들선들 바람이 불어오는 삼문 아래서 10여 분쯤 휴식을 취하며 재충전을 했다. 그런데도 답사욕구가 올라오지 않았다. 임제종의 본찰이며 일본 사찰정원의 백미 조원지조차도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텐류지 답사를 포기했다.

아라시야마의 텐류지(천룡사)

도게교(도월교)를 향해 걸었다. 텐류지와 도게교 사이에는 상점거리가 있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점은 국적을 불문하고 뻔하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몸에서는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요구했다. 몇몇 상점에 들어가 체크카드를 사용할 수 있냐고 물었지만 모두 ‘노’였다. 더위에 갈증을 꾹 참고 도게교로 올라섰다. ‘도게교(도월교)’라는 이름은 13세기 가메야마 상황(上皇)의 시(詩)에서 유래되었다. ‘보름달이 다리 위를 걷는다’라는 구절이 도게교(도월교)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도게교 위에서 내려다보면 가쓰라강 북쪽으로 하타씨가 쌓았다는 대언천 제방이 보인다. 재앙과도 같았던 가쓰라강의 풍부한 수량을 이용해 농업혁명을 가져온 전설적인 제방이다.

도게교 건너편 법륜사 전망대에 올랐다. 아라시야마를 비롯해서 교토시내가 눈앞에 펼쳐진다. 10여 분쯤 머물렀을까 인적이 드문 전망대에 혼자 서 있으려니 무료하다. 마쓰오 신사 답사마저 포기하고 아라시야마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돌아가는 길에 도게교 부근에서 시원한 생맥주를 마셨다. 몇 집을 돌며 ‘체크카드 됩니까?’라고 물은 뒤에 얻은 행운이다. 아쉬웠던 것은 상가에는 전범(戰犯) 기업 아사히 맥주밖에 없었다는 것. 더위가 양심을 이긴 날이다.

법륜사 전망대에서 바라 본 아라시야마 일대

 

니시키 시장이 교토의 부엌이라고?

니조성을 가려다 길을 잃고 헤맸다. 니조성은 에도막부의 최후를 추억할 수 있는 유적이다. 조슈번, 사쓰마번 등의 왕정복고운동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에도 막부(幕府). 나에게 에도막부의 몰락은 ‘바람의 검 신선조’라는 영화로 기억된다. 막부 말기 에도에서 교토로 가는 쇼군의 신변보호와 교토의 치안을 위해 조직된 무사조직 신선조. 정권을 천황에게 바치는 대정봉환(大正奉還) 혼란 속에서 시류의 흐름에 따라가기보다 전근대적 죽음으로 막부에 충성을 바쳤던 무사들. 때론 그들의 우직한 삶이 그립다.

니조성 부근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니시키 시장’을 외쳤다. 니시키시장은 ‘교토의 부엌’이라고 말한다. 교토에는 니시키시장 외에 대형 마켓이 많지 않다. 교토사람들은 이곳에서 생활용품이나 식료품을 구입한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장은 활기찼다. 가게마다 호객행위도 적극적이고 골목에는 관광객들로 가득 찼다. 진열된 상품들은 전통 음식인 단무지나 장아찌도 있었지만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길거리음식이나 음료들, 도자기가 많았다. 우리나라를 찾는 관광객들이 서울의 남대문시장이나 광장시장에서 한국인의 삶을 엿보듯 교토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니시키시장에서 일본인들의 일상을 배운다고 한다. 니시키시장을 답사하며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교토의 부엌이라면 당연히 갖춰야할 곡물이나 생선, 육류, 의류가게가 없다는 것. 그래서인지 손님들 중에 일본인은 거의 없다. ‘교토의 부엌’이라는 호칭이 무색한 풍경 앞에 삶과 동떨어져 가는 우리 전통시장의 미래,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이 보였다.

니시키시장

 

환상의 사찰 도후쿠지(동복사)

일본을 여행하려면 촘촘한 여행계획과 예약은 필수다. 일본은 호텔 뿐 아니라 대중교통까지 할인율이 다르다. 무지와 용기만을 믿고 떠난 필자는 엉성한 계획 때문에 손해를 많이 봤다.

3일째는 교통상황이 어느 정도 파악되어 전철과 시내버스만으로 여행하기로 했다. 오전에는 전날 제외시켰던 도후쿠지(동복사)와 산주산겐도(삼십삼간당)를 답사하고, 오후에는 기요미즈테라(청수사)와 산넨자카, 닌넨자카를 거쳐 야사카 신궁, 은각사와 철학의 길을 답사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기온시조역으로 가서 전철을 탔다. 기온에서 도후쿠지역까지는 불과 세정거장.

도후쿠지(동복사)는 가마쿠라시대의 대표적인 선종(禪宗)사찰이다. 헤이안시대 후지와라씨의 씨사로 건립되었지만 1236년 관백을 지낸 구조 미치이에가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하면서 현재와 같은 대찰(大刹)이 되었다. 도후쿠지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성일스님이다. 송나라 유학파로 귀국 후 수많은 사찰에 주석하며 선풍(禪風)을 일으켰던 성일은 말년에 도후쿠지에 초빙되어 절을 짓고 사세를 확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도후쿠지 삼문

도후쿠지 입구에는 탑두(암자와 비슷)가 많다. 본래는 80여 개나 되었던 것을 메이지유신 때 폐불훼석하면서 24개로 줄었다. 도후쿠지 경내는 관광객도 거의 없는데다 맑고 깨끗했다. 3층 누각의 장대한 삼문(三問)에서 답사를 시작했다. 삼문 뒤에는 법당이 있고 좌우에는 선당(禪堂)과 방장이 있다. 법당을 답사하고 있는데 방장 안에서 입장권을 팔고 있었다. 교토를 답사하며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가 입장권을 파는 곳에는 중요한 문화재가 있다는 사실. 얼른 뛰어가 입장권을 구입했다.

어두침침한 누마루를 지나자 확 밝아지며 방장(方丈)과 함께 아름다운 정원이 나타난다. 일명 마른산수(가레산수이)다. 자료에는 1930년대 근대 정원예술가 시게모리 미레이가 만든 작품이라고 쓰였다. 선종사찰에서 정원은 수행행위다. 방장 누마루에 멍하니 걸터앉아 마음을 비웠다. 다른 관광객들도 고요히 앉았다가 일어날 뿐 발소리마저 죽인다. 방장 뒤편은 또 다른 절경이다. 앞쪽이 정적(靜的)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다면 뒤쪽은 살아 있는 생동감이 돋보인다. 청아한 물소리, 푸른 숲, 인공적 요소가 절제된 풍경은 마치 선계(仙界)에 들어온 느낌이다.

통천문 입구에서 또 입장료를 냈다. 무려 600엔이다. 하지만 머뭇거리지 않았던 것은 지불한 만큼 볼거리가 많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통천교는 개산당으로 건너가는 회랑형식의 다리다. 다리 위에 지붕을 덮었는데 좌우 풍경과 어우러져 통쾌하고도 수려하다. 통천교를 건너 개산당으로 넘어간다. 개산당은 성일국사를 모신 탑두다. 개산당 마당에도 멋진 가레산수가 펼쳐졌다. 관광객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마루에 걸터앉아 침묵한다. (계속)

도후쿠지의 개산당과 가레산수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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