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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과 평택 ④-2 미군 위안부의 역사 _ 기지촌과 미국 위안부
평택시민신문 | 승인 2018.09.12 09:30|(928호)

[평택시민신문]

기지촌에서 매춘과 성폭력은 절대 구분되지 않았다

 

주한미군을 상대하는 기지촌 여성들의 몸은
국가의 이해관계 속에서 철저한 관리대상이 되었다

 

 

3. 성폭력, 성매매 방지 운동과 미군 위안부

미군범죄 대개 기지 주변 매춘골목에서 발생

‘두레방’ 등 여성 쉼터가 기지촌 문제 해결 노력

 

여성운동으로서의 성폭력 추방운동

성폭력 추방운동은 1990년대 들어와 가장 주목받는 운동이 되었다. 여성의 전화에서는 1983년부터 가정폭력을 포함한 성폭력문제를 다루어 왔다. 1984년 여대생 추행사건, 1986년 부천 권인숙 성 고문사건 등 공권력에 의한 성폭력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사회문제화 되었다. 그 이후 인신매매가 사회문제로 떠올랐고 김부남사건, 김보은사건 등 성폭력 사건을 심각한 폐해로 인식하고 성폭력 근절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성폭력 특별법 제정운동을 펼쳤다. 경기도 여러 지역에서 ‘여성의 전화’가 생겨났고, 1991년에는 성폭력상담소가 개소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에서는 1992년을 ‘성폭력 추방의 해’로 정하고 전국적인 여성단체의 연대활동을 강화하는 활동을 벌인 결과 성폭력 문제가 여론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성운동이 된 것이다. 경기도에서도 성폭력을 계기로 여성단체들의 연대활동이 만들어지고 그 연장선상에서 1994년 경기여성연대가 창립되기도 했다.

그런데 경기도에는 오래전부터 아주 특별한 성폭력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른바 주한미군 주둔지에서 벌어지는 성폭력이었다. 1992년 동두천에서 발생한 윤금이 살해사건은 우리 사회에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문제를 돌아보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 사건은 한국 법정에 미군을 세우는 이례적인 사건이 되었다. 미군군대는 이 사건을 감추려고 했고 보상으로 빨리 끝내려 했다. 그 이전에도 미군에 의한 매매춘여성들의 살해사건 및 폭력사건은 무수히 있어왔다. 그러나 대부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은폐되거나 묵인되었다. 그나마 이 사건이 알려지게 된 것은 끊임없는 여성들의 항의시위와 여론에 의한 폭로 때문이었다. 1988년 외무부가 펴낸 『 미군범죄의 연대별 현황 및 처리과정』에 의하면 1967년 한미행정협정이 발효된 지 20년 되는 1987년까지 발생한 미군범죄는 총 3만9452건이며 범죄에 가담한 미군수가 무려 4만5183명에 이르렀다. 이는 대개 주둔지역인 기지 주변의 매춘골목에서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측에 매우 불리하게 체결되어 있는 한미행정협정 때문에 범죄사실의 폭로나 재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주한미군에 대한 문제제기는 곧 한국사회에서는 반미=용공=반정부 운동으로 치부되었다.

 

유린된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미군정기간을 거쳐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 이후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주둔해 온 미군은 1975년 30차 유엔총회에서 ‘주한유엔사령부를 해체하고 한국에서 모든 외국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결의한 후에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주둔이라 주장하며 지금까지 주둔하고 있다.

1995년 한국 땅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병력은 총 3만7000여 병력으로 100개의 부대에 흩어져 있는 육군병력(제8군) 2만6000명과 18개의 기지에 주둔하고 있는 공군병력 1만여명이 주력을 이루고 있다. 1995년 기준으로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도시는 동두천(보병 2사단), 의정부(23지원단), 서울(주한미군사령부), 오산(7공군사령부), 평택(23지원단), 대구(19지원사령부), 부산(34지원단), 진해(해군지원요원), 군산(8전술전투비행단)이 있었다. 면적으로나 인원으로나 경기도에 가장 많은 미군이 주둔해 있었다.

1945년 미군이 한국에 온 이후 경기도에는 ‘기지촌’이라고 불리는 미군의 거주지와 상권이 여러 곳에 생겨났다. 그러나 점차 기지촌은 미군들과의 성 거래가 이루어지는 섹스시장의 대명사로 인식되었다. 한국 정부가 1960년대부터 윤락여성방지법 제정 등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윤락여성에 대한 단속과 제재를 강도 높게 진행했지만 기지촌은 예외였다. 닉슨 독트린 정책(1969)에 의하여 주한미군의 감축이 시행되었을 때에는 미군의 계속적인 주둔 여건을 만들기 위하여 ‘기지촌정화운동’이 시행되었다. 그 운동의 중심 내용은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성병관리를 통한 ‘정화’였다. 미군 위안부 여성들은 성병관리를 철저히 받아야 했다. 이렇게 미군을 상대하는 기지촌 여성들의 몸은 국가의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철저한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은 이러한 국가의 이해를 둘러싸고 역사적, 문화적인 희생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미군을 위한 군대창녀촌으로 오히려 묵인‧지원‧관할‧운영되었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미군을 상대하는 클럽에 면세혜택을 주었고, 관광사업으로 독려하기도 했다. 1960년대 동두천 주변에는 미군이 직접 운영하는 소요산의 일명 몽키하우스, 부평에는 제인원 등의 성병 수용소가 있었다. 이 수용소에는 미군을 상대로 하는 여성들 중 성병에 걸려 불합격 판정이 난 여성들을 검거하여 미군의관들이 직접 호스타시링 등 항생제를 놓아가며 격리 강제 수용하였다. 이는 성매매 당사자들 중 오직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불평등한 조처였을 뿐 아니라 명백한 인권침해이며 인권유린이었다. 또 미군상대의 클럽 입구에는 클럽 카드가 비치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성병 검진에 패스한 여성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고, 미군들은 그 번호와 사진을 보고 여성을 고르기도 했다. 이렇게 일방적이고 불평등한 구조에서 일어나는 매매춘행위와 성폭력은 절대 구분되지 않았다.

 

 

기지촌 여성들의 쉼터 ‘두레방’

1987년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변화가 시작되었다. '반미=용공'이라는 사슬에 묶여 더 이상 굴종적인 한미행정협정을 묵인하고 미군범죄를 은폐할 수는 없었다. 1986년 3월 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가 중심이 되어, 의정부시 가능동에 한국 최초로 기지촌여성의 쉼터 ‘두레방’이 문을 열었다. 이것은 어떠한 사회운동도 있을 수 없었던 기지촌에 귀중한 여성운동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었다. 어느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후 3년여의 기간 동안 법적지원뿐 아니라 기지촌여성들의 일상적인 문제들을 파악하고 그 해결을 시도하는 프로그램을 개발(상담과 교육)하고, 임파워링(주인의식부여)을 실행하면서 기지촌여성과 함께 했던 두레방은 점차 매매춘 여성들에게 ‘친정’, ‘친정어머니’같은 존재가 되었다.

또한 1989년에는 아직도 성공적인 전업프로그램으로 인정받는 두레방 빵사업이 시작되었다. 두레방 개원 후부터 경험을 통해 두레방은 기지촌여성들과의 만남이 불규칙적이고 단시간의 상담과 교육사업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나이가 60이 넘은 할머니들도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매춘을 하는 현실을 보며 그 무엇보다도 전업사업이 시급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두레방 빵에 취업한 여성들은 다른 사업에 참여하는 기지촌여성들보다 의식이나 생활태도의 면에서 훨씬 큰 변화를 보여주었다. 두레방빵에 취업한 여성들은 점차 두레방 활동의 목적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간사들이나 자원활동가 못지않은 자생적인 활동가로 성장해갔다.

1990년 12월 두레방은 동두천시에 또 하나의 ‘두레방’을 마련했다. 동두천은 단일 시로서는 최대의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동두천 보산동의 기지촌은 Camp Casey 앞 길 건너 철도 길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데, 70-80년대 기형적 발전을 거듭하면서 1만 명이 넘는 기지촌 여성과 150여 쌍의 국제 결혼한 여성들, 혼혈아들, 100여개가 넘는 미군 전용 클럽, PX에서 쏟아지는 물건으로 인한 블랙마켓 등 엄청난 사회문제를 안고 있는 기지촌의 대명사로 불려졌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는 기지촌여성운동의 중요성이 여러 조직에서도 인정되면서 확산되는 시기였다. 산발적으로 이루어져 오던 기지촌여성운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나갔다. 특히 이 시기에 기지촌활동으로 모여진 뜻있는 여학생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각 대학의 여성운동조직들이 기지촌여성문제를 인식하고,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기지촌활동(기활)을 시작했다. 농활에 비해 짧은 기간이지만 기활은 참가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기지촌 여성운동가들이 생겨났다. 이들의 지원으로 두레방은 기지촌아이들을 위한 놀이방과 공부방을 개원할 수 있었고, 동두천 ‘두레방’도 열 수 있었다.

기지촌활동을 통해 기지촌여성들과 대학생, 양쪽에 큰 의식의 변화가 일어났다. 대학생들은 기지촌여성들과의 만남을 통해 여러 가지 편견을 깰 수 있었고, 기지촌여성의 문제가 한국사회에서 심각하고 중요한 사회문제이며 동시에 여성문제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기지촌 여성들 역시 처음에는 대학생들의 의도를 오해하고 불신하기도 했지만, 차츰 마음 문을 열고 자신들과 너무도 다른 대학생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렇게 기지촌활동은 대학생들이 여성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는 효과적인 교육의 장이었다. 기지촌 활동이 서울 및 수원 여대생대표자협의회(여대협)의 공식적인 활동으로 자리 잡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평택의 기지촌 여성과 쉼터1991년 동두천에서 두레방 활동을 하던 경기지역 한양대 여성학생들과 이미 송탄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연자가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이들은 송탄기지촌에서의 활동을 고민하게 되었다.

송탄지역이 주한미군과 관계를 맺은 것은 1951년이다. 한국전쟁으로 들어 온 미국의 제5공군 전술전투부대가 1951년 11월 오산리공군기지(K-55)에 정착했다. 이 지역에 기지촌 여성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1960년대였다. 파주, 동두천, 연천 일대의 미군기지가 감축되면서 이주한 여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래 빈농이나 도시빈민의 자녀들이었다.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고, 동생을 공부시키고, 재수가 좋으면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이민을 가는 것이 꿈인 소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모여든 여성들이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1900여 명.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꿈처럼 희망으로만 가득 차있지 않았다. 돈을 벌기는커녕 몸만 망치고 혼혈 아이를 낳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여성들도 많았다. 여기 당시 평택 안정리 기지촌에서 일 했던 한 여성의 증언이 있다.

“그때가 서른두 살이었다. 1000명이 넘는 미군, 화려하게 화장한 여자들. 처음 보는 광경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도 차차 적응했다. 감찰을 맡아 회비도 걷고 패스(성병 검진표) 검사하는 일을 하며 다른 여성들을 관리했다. 감찰을 하며 안정리에서 있었던 많은 일을 지켜봤다. 악덕 포주들에게 맞고, 빚으로 허덕이는 여자들, 패스가 없어 끌려가고, 성병 치료를 받다가 쇼크를 받아 죽는 여자를 자주 봤다.

성병 검진은 일주일에 두 번씩 받았다. 한 번이라도 빠지면 큰일이 나기 때문에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면 만사를 제쳐놓고 받았다. 가끔은 다른 여자들과 모여 교육도 받았다. 성병 검진의 중요성, 미군에게 잘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가끔은 국회의원이 ‘아파트 9평짜리 여러분께 다 해주겠다’ 며 ‘외화 버느라 고생이 많다’며 격려해줬다.

나이가 들어서도 클럽을 떠나지 않았다. 서빙을 하는 웨이트리스로 일을 나갔다. 돈을 악착같이 모았고, 버는 대로 예금했다. 어느 날 잊고 있었던 남동생이 찾아왔다. 살기 힘드니 돈을 달라고 말했다. 소리 지르고 행패를 부렸고, 돈을 줄 때까지 계속 찾아왔다. 모아놓았던 돈을 내어줬다. 그리고 또다시 일하고 돈을 모았다. 저녁 6시에 출근해 새벽 2시까지. 주말에는 새벽 4시까지 일했다. 밤낮이 바뀌어서 힘들고 허리가 아파도, 술병을 나르고 안주를 들었다. 협심증으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때가 되던 59살, 28년간의 클럽 생활을 마무리했다”

1993년 경기남부지역의 대학생들과 김연자씨가 함께 송탄에 방 두 칸짜리 주택을 얻어서 참사랑선교원(탁아소)을 개원하였고, 기지촌에서 일하는 여성들과 아동들을 돌보는 활동이 시작되었다.

 

4. 다시 평택으로

새로운 미군 위안부들이 평택으로 몰려 들 것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비참한 삶 계속되고 있어

평택에서 미군기지관련 운동이 시작된 것은 1990년 3월 용산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한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지역에 알려지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시민7명이 모여 <용산기지평택이전을 결사반대하는 시민모임>을 결성하고활발한 대시민홍보활동과 반대투쟁에 돌입하게 된다. 이해 10월말에는 <평택시민모임>과 <동두천민주시민회> <군산옥구민주연합>등 15개 단체가 <미군기지반대전국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 연대활동을 결의하였다. 평택시민들의 국제연대호소 및 국내추쟁에도 불구하고 60여 년 간 서울 용산에 주둔해 온 미 8군 사령부가 드디어 2017년 7월 11일 경기도 평택미군기지로 이전되었다. 4만여명의 미군과 미군 가족 및 근로자들이 내년까지 평택으로 이전할 예정이다. 전국에 흩어져 주둔하고 있던 미군의 90%가 평택으로 집결되기에 그에 따른 경제적인 파급효과도 상당할 것으로 기대되는데 그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미군위안부들일 것이다. 제2의 이태원이 될 평택이라면 그것은 제2의 이태원 미군위안부 바람도 불 것이기 때문이다. 새세대(?) 미군 위안부들이 평택으로 몰려 들 것이다.

반대로 신업역군으로서 또 ‘민간외교관’으로서 칭송을 받던 평택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지금 늙고 병들어 기지촌의 쪽방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국민기초생활보호대상자인데, 평택으로의 미군기지 이전공사가 본격화됨에 따라 안정리 일대의 땅값은 급등하였고 그와 함께 전/월세 시세도 상승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일대에 땅을 가진 사람들은 재래식 건물을 철거하고 미군들에게 임대하기 위한 넓은 평수의 신축건물이 대거 들어서면서 그나마 연탄보일러를 사용하는 월셋방 자체가 격감하고 있다. 이제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주거문제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다.

1960년대에는 남한 국민총생산(GNP)의 25퍼센트를 차지하도록 경제 성장을 이루는데 밑거름이 되었으며 송탄경제의 60퍼센트를 부양했건만 정부나 지방은 아직까지 아무런 대답도 없다. ‘성매매특별법’ 3주년이나 지났건만 전쟁으로 인한 성매매여성인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는 아직도 아무런 지원조항이 없다. 또한 ‘평택지원특별법’에도 지원조항이 한 줄도 없다. 아직도 가족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사회로부터 내몰려 홀로 죽어가는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비참한 삶은 계속되고 있다.

 

글: 오유석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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