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에서 느끼는 하나의 임진왜란, 두 개의 관점

[평택시민신문]  ‘가깝지만 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일본. 위치상으로는 가까이 있지만, 오랫동안 이어져온 역사‧문화적 갈등으로 우리는 일본 그대로를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다.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도 “40여년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쳤지만 일본을 너무 몰랐다는 반성이 가슴을 찔렀다”고 고백하며, 일본 교토로 자유여행을 다녀왔다. 역사와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진행된 이번 교토여행을 통해 “일본에 대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다”는 김해규 소장. 한광중학교 역사 교사이기도한 그의 ‘좌충우돌 교토여행기’를 <평택시민신문>은 5주간 연재하며, 일본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역사는 피해자 입장에서 해석돼야 정의가 바로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리에게 그것을 깨닫게 한다

 

도요쿠니 신사(神社)의 역사의식

도요쿠니신사 표석

박물관을 답사하고 나왔더니 어느새 5시다. 박물관에서도 문 닫을 시간이니 빨리 나가라고 재촉했다. 정문을 나서며 직원에게 박물관 맞은편 ‘산주산겐도’ 답사가 가능한지 물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직원은 아무래도 안 될 같다며 도요쿠니 신사 쪽으로 가보라고 한다.

도요쿠니신사 당문

도요쿠니 신사는 교토박물관 서문을 돌아서면 바로 뒤쪽에 있다. 이제는 구글맵 활용도 익숙해져서 헤매지 않고 찾을 수 있었다. 도요쿠니 신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 건립되었다. 히데요시는 사후 천황으로부터 정1위 풍국대명신(豊國大明神)이라는 신호(神號)를 받아 신사가 건립되었다. 하지만 1615년 오사카 전투로 도요토미 가문이 몰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으면서 히데요시 관련 유적은 눈엣 가시가 되었다. 백성들로부터 추앙받던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보전되었지만 죽은 뒤에는 참배도 막고 토지도 몰수했으며 지진으로 무너졌을 때 보수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도요쿠니 신사는 메이지유신 뒤 황명으로 호코지(方廣寺)라는 절터에 복원되었다. 호코지(方廣寺)는 본래 도요토미가 전국통일 후 건립한 사찰로 과거 정권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복원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풍국신사(豊國神社)’라고 쓴 커다란 표석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나절이어서 인적이 드물다.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당문이 보인다. 당문이 지나치게 화려해서 연원을 물었더니 복원 당시 후시미성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당문 좌측으로 돌아가면 커다란 동종(銅鐘)이 걸려있다. 규모가 다음 날 우지의 뵤도인에서 봤던 것보다 크다. 이 동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만든 것으로 겉면에 ‘국가안강(國家安康)’이라고 쓴 명문이 유명하다. 히데요리를 무너뜨리려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충신 하야시 라잔이 이 명문을 문제 삼아 싸움을 걸었고 오사카 전투를 계기로 히데요시 가문을 멸문시켰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 도요토미의 신사를 답사하는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히데요시는 일본인에게는 영웅일지 모르나 우리에게 침략자일 뿐이다. 그의 침략으로 우리는 7년 동안 고통을 당했고 백 수십만의 백성들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이처럼 이해관계가 얽힌 동북아시아의 역사는 약자의 입장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종군위안부 문제처럼 가해자는 문제를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철저하게 반성하지 않는 한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했는지 잘 모른다. 그러므로 역사는 피해자 입장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역사 정의(正義)가 바로 서고 비로소 상생(相生)이 가능하다. 도요토미는 우리에게 그것을 깨닫게 한다.

호코지(도요쿠니신사) 동종

귀무덤의 호곡(號哭)

도요쿠니 신사는 귀무덤과 세트메뉴다. 귀무덤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전공(戰功)의 증거로 베어 온 조선인의 코와 귀를 매장한 무덤이다. 봉건시대에는 적군의 수급을 베어 전공의 증표로 삼았다. 일본군은 수급 대신 코와 귀를 베어 바쳤는데 그 수가 무려 12만6000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베어온 코와 귀는 전국 곳곳에 집단 매장되었다. 그나마 원령의 저주를 무서워하는 일본인들이 땅에 묻어버리지 않고 무덤을 만들어준 것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귀무덤

귀무덤은 한국인에게 분노와 아픔의 역사다. 그래서인지 귀무덤을 답사하는 한국인들은 일본의 침략적 만행에 분노하고 죽임을 당했던 불쌍한 원혼을 기리기 위해 찾는다. 나는 귀무덤이 도요쿠니신사 바로 뒤쪽에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구글맵을 따라 신사 뒤쪽 골목길을 뒤졌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동네 주민들조차 처음 듣는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골목길을 몇 바퀴 돌다가 겨우 찾은 귀무덤은 도요쿠니 신사에서 맞은편으로 불과 200m지점에 있었다. 이때의 허탈감이라니.

귀무덤은 어린이공원과 함께 있다. 공원 이름도 ‘이총(耳塚)공원’이다. 한쪽에는 명치(明治) 연간에 소학교가 있었다는 푯말도 있다. 구조상으로 참 아이러니한 구도다. 이총(耳塚) 앞 안내판에는 영어와 일본어 외에도 한글로 유래를 적어 놨다. 들리는 말로는 근처에 사는 일본인 가족이 3대째 무덤을 돌보고 있다고 한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작은 철문에도 한글 안내판이 걸려 있기에 눈을 크게 뜨고 읽었다. 꽃이나 음식물을 바친 사람은 돌아갈 때 깨끗이 치우라는 내용이다.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관리하는 분들의 노고는 십분 이해되었지만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의 마음도 헤아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귀무덤을 찾은 것은 지인의 조언이 한몫했다. 고전무용을 전공한 춤꾼으로 2차 대전 때 괌과 사이판, 사할린에 강제징용, 징병된 원혼들을 달래주고 있는 그 분은 귀무덤에서 왜란 때 억울하게 베어져 이국땅에 묻힌 원혼들의 호곡(號哭)을 듣고 오라고 했다. 저녁노을이 물드는 7월의 늦은 오후 슬픈 귀와 코들의 호곡소리가 참으로 애처롭다.

 

가모교 근처 골목길

추정과 현실 사이에서

교토의 부엌이라고 하는 니시키 시장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니시키시장은 가모강이나 가와라마치역과 가깝고, 가모강을 건너면 곧 기온거리이기 때문에 적절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사전에 교토 지도를 수십 번 들여다보고 재삼 검토해서 정할 때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현지사정은 책상머리에서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귀무덤 답사를 마친 시간은 대략 6시 30분쯤, 해가지려면 1시간은 더 남았다. 저녁에 특별한 계획도 없어 거리구경을 하며 숙소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구글맵은 숙소까지 25분이면 당도할 수 있다고 가르쳐준다. ‘25분’이라는 단어에 불끈 힘이 솟는다. 축 쳐지는 배낭을 메고 평택지역 구시가지와 닮은 쇼멘거리를 걸었다. 도로변의 가게나 식당들도 변변치 않았는데, 그것들이 관광객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는 유명 맛집들이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글: 김해규(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교각에 압천(鴨川)이라고 쓴 가모교를 건너 한 블록을 지나자 맑고 깨끗한 고류천(高類川)이 흐르고 100년 전에 지었음직한 가게들이 하천 주위로 늘어섰다. 다다미식이라고 하는 일본의 옛날 주택들은 전면이 좁고 측면이 길다. 베트남에서도 이 같은 주택을 본적이 있는데, 옛날에는 앞면의 넓이에 따라 세금을 매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변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구글맵의안내를 무시하고 하천길을 따라 걸었다. 요즘 남자들은 아내의 잔소리와 네비게이션과 구글맵의 조언을 무시하면 큰 코 다친다는데 내가 그랬다. 덕분에 직선 25분 거리를 빙빙 돌아 1시간 만에 숙소에 도착했다. 추정과 현실 사이에서의 괴리에서 헤맨 셈이다. 어렵게 도착한 숙소는 깨끗했고 직원들은 친절하다. 푹 쉬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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