섶길과 나의 만남 (28)

박경순 시민기자
한국사진작가협회 평택시지부장

[평택시민신문]이른 아침 강당산 입구에 몇몇 사람들이 모였다. 소위 '모의'를 위해서 공복에 머리를 맞대었다.
섶길 코스 대추리길에는 강당산이 있다. 평택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대규모 적송군락지로 알려져 있다. 수령은 80년을 훌쩍 넘었으며 인근 주민들의 허파 역할을 해 오고 있다.

이 숲에 들어서면 소나무들이 코팅된 종이를 매달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주위 개발을 위해 이 소나무들을 이송하지 말아달라는 간곡한 호소문들이다. 몇 년 전부터 이 작업을 해 오신 분은 팽성 상인회 회장을 맡고 있고 그 인근에서 태어나고 자란 분이었다.
그 분은 이 일을 혼자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하고 계셨던 것이다. 마치 네덜란드의 댐에 구멍이 뚫려 있는 걸 발견한 소년이 손으로 막아냈다는 그 신화같은 얘기가 떠올랐다. 다행히 몇몇 단체들과 지각있는 시 의윈, 시 공무원들이 의기투합하여 실태조사에 나섰고 디데이(D-day)를 맞은 것이었다.

나는 이 분들이 정확한 자료를 토대로 의견을 나누는 동안 아침운동을 마치고 나오신 노인 분을 보았다. 그 분도 한 마디 거드시며 '이건 누가 봐도 지켜야하는 것' 이라며 힘을 실어 주셨다. 한동안 여러 가지 의견들을 규합하고 나서 그곳에 모인 대책위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는 '지겨내야 한다' 는데 의견이 모아지는 듯 했다.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가장 강조되고 이구동성으로 쏟아져 나온 말이 '누가 봐도' 라는 단어였다. 이 단어의 위력이 이때만큼 힘 있게 들린 적이 있던가. 이 세상에 누가 봐도 옳은 일이란 얼마나 가려내기 어려운 잣대던가.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혼령이 담겨 있는 듯하다. 어려서 부터 보아왔던, 어디서나 흔히 보이는 소나무는 우리 주변에서 우리와 함께 했다. 어려서 할머니가 송홧가루를 모아 해 주시던 노란 다식과 추석에 솔잎과 함께 쪄낸 송편은 우리의 소중한 양식이 되어 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땔감이 부족했던 그 당시 늦가을이면 숲으로 가서 솔방울을 주워 난로의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 소나무를 지키기 위해 송충이 잡으러 갔던 기억은 잊고 싶은 추억이 되긴 했지만.
실제로 소나무에는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 마을을 수호하는 통신목(洞神木, 신과 소통하는 신령스런 나무)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출산을 한 집 대문에는 금줄을 매달았는데 새끼줄에는 반드시 소나무 가지를 꿰었다. 소나무 가지는 밖에서 들어오는 잡귀와 부정을 막아주고 제의 공간을 정화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가을에 장을 담글 때에도 숯과 함께 소나무 가지를 넣었다. 또한 송진을 따서 껌을 만들어 씹기도 하고 어린 송화를  따 먹기도 했다. 이렇게 소나무는 우리 민초들에게는 생명줄과도 같은 존재로 우리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100년 뒤엔 소나무가 사라질 거라는 보도가 나돌기도 하는데, 그 우람하고 잘 생긴(?) 소나무들을 훼손하면서까지 해야 할 개발이란 어떤 명분일까?
외국에서 먼저 알려진 배병우 사진 작가의 소나무 사진이 비싼 값으로  팔려 나간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삼척 월천리 솔섬은 외국 작가가 발견하여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보다 외국이나 외국인들에게 인정받는 소나무에 대한 가치를 가벼이 여긴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 것을 지켜내려는 의지 부족은 아니었을까. 그 뒤로 사진을 촬영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소나무 사진에 심취되어 전국 유명하다는 소나무 군락지를 찾아다니며, 오히려 훼손의 우를 범하는 웃지 못 할 헤프닝이 벌어졌던 것은 사진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기조차 하다. 안개에 싸인 소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기운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구절초나 맥문동과 같은 꽃들과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로 절경을 이룬다.

농촌 계몽 소설로 유명한 심훈의 '상록수' , 가수 양희은이 부른 '저 들의 푸르른 솔잎을 보라' 에서 보듯이 우리 민족의 혼을 꿋꿋이 지켜 온 소나무를 어찌 가볍게 여길 수 있을까. 십장생 중의 하나이기도 하고 매·국·송으로 꼽히는 절개의 상징이기도 한 소나무를 지키는 일에 누가 반대하고 나설 수 있을까. '누가 봐도 옳은 일' 이 그리 흔한 일이런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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