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작 : 편견없이 일본의 속살을 들여다보다

[평택시민신문] ‘가깝지만 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일본. 위치상으로는 가까이 있지만, 오랫동안 이어져온 역사‧문화적 갈등으로 우리는 일본 그대로를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다.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도 “40여년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쳤지만 일본을 너무 몰랐다는 반성이 가슴을 찔렀다”고 고백하며, 일본 교토로 자유여행을 다녀왔다. 역사와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진행된 이번 교토여행을 통해 “일본에 대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다”는 김해규 소장. 한광중학교 역사 교사이기도한 그의 ‘좌충우돌 교토여행기’를 <평택시민신문>은 5주간 연재하며, 일본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교토국립박물관에서 바라본 교토타워

자유여행을 꿈꾸다

1990년대 초반 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가 답사 바람을 일으켰다. 전문가 영역에 있던 문화유산답사를 대중 속으로 끌어 내린 혁명적 사건이었다. 나도 한 때 유홍준 키드였다. 그가 지목한 답사지는 빼놓지 않고 다녔고 유교수의 주장을 내 것처럼 자랑하고 다녔다. 대학원에서 역사를 공부하며 ‘유홍준의 책’과는 일정한 거리가 생겼다. 그러다가 지난 해 일본답사기가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가운 마음에 총 4권 중 3권을 구입했다. 그 가운데 두 권이 교토답사기였다. 오랜만이었지만 유홍준 특유의 경쾌한 글쓰기는 여전했고 끝없는 탐구정신과 풍부한 경험은 글의 재미를 더했다. 유홍준의 교토답사기를 읽으며 ‘교토’에 가고 싶어졌다. 그의 화려한 화술과 적당한 과장 때문이 아니었다. 지난 40여년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쳤지만 일본을 너무 몰랐다는 반성이 가슴을 찔렀다.

교토자유여행을 계획했다. 함께 가고 싶었던 몇몇 지인들은 바쁘다며 고사했다. 마음이 바뀌기 전 서둘러 항공편과 숙소예약을 마쳤다. 여행을 떠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지만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가는 자유여행인데다 공항이용도 익숙하지 않았고, 대중교통 이용법과 언어장벽도 난제였다. 일본어 지명을 외우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모르는 도시라 여행계획을 짜는 것은 더더욱 힘들었다. 아무 것도 준비되지도, 준비할 수도 없는 상태였지만 이상하게도 부딪쳐보면 어떻게 해결되겠지 하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왜 교토인가?

교토는 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도시다. 우리로 치면 경주와 같아서 향후 역사여행가를 꿈꾸는 나에게는 최적의 훈련장이었다. 교토분지는 고대(古代)에 한반도 도래인들이 개발했다. 도래인들은 선진 농업기술과 양잠, 견직, 건축기술로 교토를 선진화시키는데 성공했다. 794년 간무천황은 도래인들과 손잡고 교토에 새 수도 헤이안쿄(平安京)를 건설했다. 헤이안시대의 시작이다. 헤이안시대는 점차 왕권이 약화되고 관백과 쇼군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막부체제로 접어들었던 시기다. 또 문화적으로는 중국, 한국에서 선진문물을 수입하여 일본화시켰던 문화적 완숙기였다. 교토가 실제든 명목상이든 수도로서 기능한 것은 1868년 메이지유신까지다. 물론 가마쿠라시대에는 가마쿠라에, 에도막부는 도쿄에 막부(幕府)를 설치하면서 정치적 중심역할은 잃었지만 법적으로는 1200년 동안 국왕이 거주하는 명실상부 일본의 중심이었다.

교토는 전통산업의 비중이 높다. 우즈마사의 견직물, 가모가와강과 가쓰라강을 이용한 염색업, 술과 과자, 장아찌가 그것이다. 전통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발달한 관광산업은 천황이나 막부(幕府)가 머물렀던 교토 고쇼, 니조성과 같은 성곽유적, 헤이안시대 이후의 불교유적과 유물, 도래인들과 그 후손들이 남긴 유적들이 중심을 이룬다. 장어덮밥이나 라멘, 커피와 같은 음식문화와 고풍스런 거리풍경,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한 자연풍광도 중요한 관광자원이다.

나는 평소 일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과거 식민지배의 후유증 때문만은 아니다. 집단적 사고와 가볍고 진정성이 결여된 듯한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고, 역사나 문화에 대한 편견도 적잖았다. 이번 여행에서는 그 같은 편견을 접어두자고 마음먹었다. 전제 없이 일본의 속살을 들여다보자고 생각했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오른 뒤 책 몇 페이지 뒤적였을 뿐인데 벌써 일본이다. 한국과 일본이 이웃이었음을 실감한다. 간사이공항에서 입국수속을 일사천리로 마쳤다. 길을 모르면 아무나 붙잡고 물었고 핸드폰 유심 교체로 헤맬 때도 대만 관광객의 도움으로 무사히 해결했다. 언어장벽, 문화장벽도 별로 느끼지 못했다. 모르는 길은 구글맵이 뚫어주고 막힌 대화는 핸드폰 번역기가 해결해줬다.

교토국립박물관 전경

교토여행의 종합선물세트 ‘교토국립박물관’

간사이공항과 교토를 연결하는 JR하루카 특급 안에서 여행일정을 정리했다. 교토에 왔으니 우선 ‘교토국립박물관’을 가자고 마음먹었다. 종합박물관은 그 도시의 종합선물세트와 같아서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기초가 될 터였다. 교토역에 도착하여 구글맵이 안내하는 대로 걸었다. 박물관은 분명 지도상으로 두어 블록 건너편에 있었는데 도무지 안내하는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헤매다가 택시를 탔다. 교토 택시는 소형, 중형, 대형에 따라 기본요금이 각기 다른데 다행히 가장 낮은 450엔짜리다.

교토국립박물관은 1897년 제국교토박물관으로 개관했다. 일본에서는 도쿄국립박물관, 국립나라박물관과 함께 3대박물관에 속한다. 설계는 궁정건축가 가타야마가 했다. 본래 3층 바로크양식으로 구상했다가 지진 때문에 단층으로 바뀌었다. 1966년에는 본관 우측에 신관을 건축했다. 2014년 이것을 재건축하여 상설전시실로 사용한다. 교토국립박물관은 헤이안시대부터 에도시대까지 약 1200년 동안의 문화유산을 전시하고 있다. 이 시기는 한국과 문화교류도 활발해서 한일문화사나 조선통신사 관련 유물도 상당 수 있다. 본관은 특별전시 때나 개방한다.

교토국립박물관 신관에서 바라본 박물관과 산주산겐도 풍경

상설 전시실은 1층에는 불상, 2층은 회화, 3층은 도기와 자기를 전시한다. 전시실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가마쿠라시대의 불상과 에도시대의 회화였다. 헤이안시대 불상이 통견에 석굴암본존불과 같은 도톰한 얼굴을 하고 있다면 가마쿠라시대는 우견편단에 좀 더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어 왜 이 시대를 일본문화의 완숙기라고 하는지 알게 했다. 회화작품 가운데는 17세기 해비우설필(海比友雪筆)이 그렸다는 ‘사계경작도’가 눈길을 끌었다. 이 그림은 17세기 중반이라는 이른 시기에 이앙법이나 상공업활동이 활발했음을 보여 주고 있어 조선 후기 우리나라와 비교되었다.

글: 김해규(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답사를 마치고 1층 기념품 가게에서 박물관 도록을 찾았다. 사진촬영을 금지해서 가마쿠라시대 불상을 도록으로라도 감상하고 싶었다. 그런데 특이했던 점은 도록에도 내가 점찍어 두었던 몇 몇 불상이 빠져 있는 거였다. 그것은 다른 도록들도 마찬가지였다. 걸핏하면 비불이니 뭐니 하며 문화유산 공개를 꺼리는 일본의 태도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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