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포럼 강연회 _

평택포럼, 베트남 우호교류 위한 첫발…강연회 개최

지난 20일 평택포럼은 남부문예회관에서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를 초청해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상 및 시민교류 우호관계 방향 모색’을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다.

[평택시민신문] 평택포럼(대표 이재덕)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상 및 시민교류 우호관계 방향 모색’을 주제로 지난 20일 남부문예회관 3층 세미나실에서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번 강연회는 지역사회 민간단체인 평택포럼이 베트남 시민들과 교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첫 단계로 기획됐으며,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가 강연을 맡았다. 구 상임이사는 호치민 국립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1999년에 한계레21을 통해 베트남 전쟁 당시 일어났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최초로 폭로한 바 있으며, 현재 베트남 사회적 기업 ‘아맙’의 본부장을 맡고 있다.

이날 구 상임이사는 “한국과 베트남은 같은 전쟁을 겪었음에도 서로 기억하는 전쟁이 다르다”면서 “한국에게는 공산주의 대 반 공산주의 전쟁이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자국을 침략한 미국에 대한 민족해방전쟁, 독립전쟁, 통일전쟁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또 우리는 흔히 베트남전쟁이라고 부르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그 전쟁을 ‘미국의 베트남전쟁’이라고 부른다”면서 “베트남전쟁이라고 명명하면 침략 주체가 지워져버리는 문제가 있다. 미국에서도 America war in vietnam이라고 부르지만 유독 한국만 베트남전쟁, 월남전으로 부른다”고 지적했다. 베트남전쟁이 일어나던 당시에도 한국은 국제사회의 인식과도 정반대의 태도와 입장을 취했다. 구 상임이사는 “미국이 이 전쟁을 국제화시키기 위해 UN과 NATO에 참전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부당하고, 자국민에 의해서도 거부당해 징집거부자가 57만 명, 1968년에 미군 탈주병이 5만3000명에 달했다”며 “전 세계적으로도 반전운동이 일었다. 일본은 시위를 위해 총파업을 했고, 북한도 반전운동이 있었다. 그런데 유독 한국만이 반전시위의 무풍지대였고 심지어 참전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미국의 참전요청에 가장 먼저 화답한 나라, 유일하게 전투병력을 파병한 나라, 가장 일찍 참전해 가장 오래 주둔한 나라, 그리고 가장 많은 잔혹행위를 저지른 나라”라고 지적했다.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베트남 꽝응아이성 빈호아 마을에는 한국군의 전쟁범죄를 기록한 증오비가 서 있다. 구 상임이사는 “이 마을에선 1966년에 한국군이 벌인 학살에 의해 430명의 주민들이 희생됐는데, 430명의 희생자 가운데 280명은 여성, 그중 8명은 임산부, 180명은 어린아이, 몇몇은 노인이었다. 한국군은 이들을 산 채로 불에 던지고, 참수 시키고 배를 갈라 죽였다”고 설명했다. 증오비에는 ‘하늘에 가 닿은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는 문구와 함께 한국군이 주민들을 학살한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돼있다. 그런데 한국에는 이 증오비와는 전혀 다른 것이 서 있다. 전국방방 곳곳에 우후죽순 생겨난 월남참전기념비가 그것이다. 구 상임이사는 “월남참전기념탑에는 한국 군인이 어린 아이를 구출하는 동상을 세워놓고 ‘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 돌아왔노라’ 같은 내용이 일반적으로 적혀있다”고 말했다.

 

베트남전쟁의 경제효과

베트남전쟁으로 한국이 경제성장을 이룬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구 상임이사는 “실제 한국은 8년 6개월 동안 32만 명의 병사를 파병해 1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파병 바로 전 해인 1963년 한국 총 수출액이 1억 달러 미만이고 한일협정으로 받은 돈이 8억 달러임을 상기해볼 때 적지 않은 돈이었다고 할 수 있다”면서도 “베트남전쟁으로 가장 큰 특수를 누린 나라는 일본이고 25명을 파병한 대만의 전쟁특수도 한국과 별 차이가 없었다. 베트남에 파병된 각국 장병의 월 보수액을 보면 하사 기준 태국이 257.68달러, 필리핀이 279.68달러 한국이 82.90달러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 당시 경제적 이득을 이렇게 참전을 통해서만이 볼 수 있었을까”라면서 “나아가 진짜 경제에 기여한 것이 맞는지, 참전용사들이 제대로 못 받은 돈이 박정희의 호주머니에 들어간 게 아닐까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일본과 다르지 않은 한국의 태도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대통령 중 최초로 통일 베트남에 가서 “한국과 베트남 불행한 역사를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구 상임이사는 “이 같은 유감발언은 일본 총리들도 수백 번 했다. 이러한 발언을 우리는 사과가 아니라고 받아들였다”고 지적했다. 꽝남성 하미 마을에 서 있는 위령비는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대하는 한국의 태도가 일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68년 한국군에 의해 135명의 주민이 학살당한 하미 마을은 2000년 한국의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베트남 민간인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를 짓겠다고 제안해오자 희생자들의 이름과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에 대한 묘사가 새겨진 위령비를 세웠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베트남 방문당시 세워주겠다고 약속한 병원과 학교를 위한 부지를 선정하러 다니던 외교관 이용준(‘베트남, 잊혀진 전쟁의 상흔을 찾아서’ 저자)이 비문 내용을 보고 나서 이 사실을 정부에 알렸고 비문을 없애라는 한국정부의 압력이 시작됐다. 구 상임이사는 “한국정부는 하비 마을 공무원들에게 한국관광을 시켜주는 한편, 병원과 학교 설립을 들먹이며 압박을 가했다”면서 “마을은 단 한글자도 못 고치겠다고 버텼지만 베트남 중앙정부의 결정에 의해 결국 비문은 연꽃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으로 덮였다. 일본전쟁범죄와는 그 정도가 비교불가 하지만, 한국의 이 태도만큼은 소녀상을 없애라는 일본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꼬집었다.

한편 이날 강연회는 내부 행사로 치러졌으나 베트남전쟁 당시 고엽제 피해를 입은 참전 군인이 찾아와 강연을 듣고 당시의 상황을 간과한 일방적인 내용이라고 항의하는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유지훈 평택포럼 사무국장은 “참전하신 분들을 무시하는 차원에서 계획된 것이 아니며 추후 구체적인 부분들을 다시 논의하는 자리를 갖겠다”고 말했다.

 

>> 미니인터뷰 이재덕 평택포럼 대표

지방자치의 원년이었던 1995년 결성된 평택포럼은 23년간 지역 현안을 토론‧연구하며 시정에 대안을 제시해왔고, 국제교류분과를 통해 해외 민간단체들과의 우호교류도 진행해왔다. 올해 2월 취임한 이재덕(62) 평택포럼 대표를 만나 이번 강연의 추진배경과 향후 계획을 물었다.

베트남과 민간 교류를 추진하는 이유는.
평택포럼 국제교류분과에서는 96년부터 일본 시민단체와 교류를 해왔지만 20년 넘게 지속하다보니 회원들이 노쇠 하는 등 한계가 왔다고 느꼈다.
대안으로 베트남이 선정됐던 건 몇몇 대표 전임들이 일본에 갖은 채권이 우리는 역으로 베트남에 있지 않느냐 하고 문제를 제기해준 게 계기가 됐다. 알아보다가 한베평화재단이 있어 초청 강연을 하게 됐다. 다른 지자체서 교류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시작계기는 확연히 다르다. 용산은 맹호부대가 용산에 본부를 두고 있기 때문에 베트남 전투지역과 민간 차원의 교류를 했고 강진군의 경우 농촌총각으로 인해 외국인신부가 많은데 그중 40%가 베트남에서 왔기 때문에 교류가 활성화돼있다.

과거사 청산을 염두에 두고 있나?
정치적인 논의는 배제 한다. 일본과 교류할 때도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민간끼리 만나면 교류할 게 많다. 강연은 알아가는 과정에서 개최한 것이다.

교류방안은?
베트남은 사회주의 나라라 시민단체가 없다. 교류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다. 마을을 소개 받아 봉사차원에서 접근할 수도 있고 용산구에서 하던 의료봉사 같은 방식을 벤치마킹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평택시의사회가 참여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수 있다. 평택대에 베트남학생이 500여 명인데 그런 부분에서 대학과도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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