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깃든 사회로의 전환으로 희생양 메커니즘 더 이상 작동하지 않길”

박은석 평택시민신문 기자

[평택시민신문] 올해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어벤져스:인피니티워>에서 슈퍼 빌런(악당) 타노스는 우주 생명체의 반을 몰살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우주의 지속가능한 발전이다. 한정된 자원 속에서 급속도로 늘어나는 우주 생명체가 우주를 황폐화시킨다는 판단에 극단적인 처방을 내린 것이다.

반면 영화의 히어로로 등장하는 어벤져스 멤버들은 그들 중 한 두 사람만 희생시키면 타노스의 습격을 중단시킬 수 있고 우주 생명체도 지켜낼 수 있지만, 그 한 두 사람을 희생양 삼지 않고 끝까지 타노스에 함께 맞선다.

이러한 타노스와 어벤져스 멤버들의 상반된 태도에서 영화는 꽤나 오래된 철학적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진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한가?’ 이 질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윤리시간에 그렇게 배웠고, 이런 주제의 영화‧소설‧드라마 속 선한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해온 결과다.

반면 <회색인간> 다수의 단편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위기 상황에서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선택을 강행한다.

예를 들어 신이 정한 단 한 명이 소원을 빌면, 신이 그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신의 소원’에서 인류의 공동선과 동떨어진 소원을 말할 것이라는 이유로 다수는 신이 정한 그 한 명을 제거한다.

‘운석의 주인’에서 다수는 지구로 향하고 있는 운석이 주인공이 머무는 곳에 떨어진다는 설정 속에서 그 주인공을 로켓에 태워 우주로 날려 보낸다.

‘식인 빌딩’에서는 식인빌딩 안의 갇힌 다수의 사람들을 위해 노숙자가 희생되기도 하고, 사형수의 조기 사형집행이 논의되기도 한다.

어마어마한 살덩어리가 지구에 떨어지고, 이 살덩어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상황이 연출된 ‘어디까지 인간으로 볼 것인가’에서도 다수는 그 속에 갇힌 사람들과 함께 살덩어리를 폭파시키는 결정을 한다.

이러한 <회색인간>을 몰입해 읽다보면 비록 소설 속 무대는 비현실적이지만, 그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위기에 반응하는 모습은 현실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소설 속 인물 중 하나가 됐을 때, 특히 운이 좋아 다수에 속하게 됐을 때,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들이나 그 희생에 침묵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다른 행동을 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설은 인간의 본능과 이기심을 들추어내며 인간이 그리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이지 않다는 불편한 진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윤리의식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형성된 다수와 소수의 대립 속에서 소수자가 될 수 있는 나, 나의 가족, 나의 이웃의 인권을 위해 개개인의 도덕성에만 호소하는 것은 어딘가 께름칙하다. 따라서 늑대와 같은 인간의 야수성이 드러나지 않아도 되는 안정적인 사회적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이 시스템의 핵심으로 평화를 요구하고 싶다. <회색인간>의 등장인물들이 소수의 희생을 선택한 배경을 살펴보면 다수와 소수,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위기상황에 수동적으로 놓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대한민국 사회는 남북의 긴장으로 위기가 항상 전제돼 있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대중은 사회(체제)에 위협이 되는 존재를 제거해야 한다는 선동에 쉽게 넘어갔다. 그에 따라 제주4‧3사건, 5‧18광주 민주화 운동, 21세기에도 진행된 수많은 간첩조작사건까지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희생양 메커니즘이 끊임없이 작동해 왔다.

그러나 남북한 분단의 역사 70년 만에 남북 정상회담 및 북미 정상회담으로 한반도의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앞으로 어떤 우여곡절이 있든지 간에 남북 평화시대가 열리길 바라며, 평화적 남북관계를 통해 ‘위기 담론’이 지금보다는 현저히 줄어들길 바란다. 또한 이를 통해 국가를 위한, 다수를 위한 무자비한 희생양 메커니즘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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