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삼 수석교사(비전고)

[평택시민신문] 오십대 중반의 늙수그레한 남교사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밑도 끝도 없이 내민 시험지에 중·고등학생들이 보인 반응은 비슷했다. ‘이건 뭐지?’, ‘첫 시간부터 무슨 시험?’, ‘지금 장난하나?’ 약간의 긴장과 불만, 불평 섞인 몇 마디. 황당한 표정과 불만이 묻어있던 얼굴은 문제를 읽으면서 미소로 바뀌었고 간간히 낄낄거리는 웃음소리, 거기까지는 같았다. 그러나 떠들썩한 중학교 교실과 고등학교는 달랐다. 올해 학교를 옮기고 처음 만난 비전고 2학년 학생들 중학생이 아니었다. 많이 조용했다. 예상 밖의 반응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교사인 나였다.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시험 중에 답을 찾아 교실 뒷문을 열고 나간 아이들은 중학생이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답을 물어본 친구도 중학생이었고, 미술대학과 관공서 전화번호를 과감하게 누른 아이들도 모두 중학생들이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답을 확인하고 물어보는 장면도 중학교 교실이 압도적이었다. 고등학교 교실에서도 드물게 발견되긴 했지만 그조차도 교사인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자리를 이동했다. 고등학생들은 대부분 자기 자리에 앉아 혼자서 답을 찾고 있었다. 비전 있는 고등학교 첫 미술 수업은 그렇게 정숙했다. 예상은 빗나갔고 재미가 없었다. 그리고 서운했다.

“답을 찾을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행동으로 옮기세요. 자리를 이동해도 됩니다. 교실 밖으로 나가도 됩니다.” 시험 보는 요령을 듣고도 교사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러워하는 고등학생들. 바로 이 모습이 우리 교육의 현주소다. 질문을 두려워하는 학생들, 도움받기를 주저하는 아이들, 호기심을 잃어가며 새로움에 도전하지 않는 아이들이 지금 우리 주변과 학교에 넘쳐나고 있다. 이 아이들에게 밖은 절대 나가지 말라고 누가 가르치고 있는가? 조용히 교실에만 앉아 있으면 답은 찾을 수 있다고 누가 말하고 있는가? 친구의 도움을 외면하며 어려운 문제를 혼자서 풀어가는 교실문화를 누가 만들어가고 있는가? 학교만 오면 교사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이 소심함은 왜 어른이 다 된 고등학생들에게도 남아있는가?

첫 미술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시작한 시험이지만 시험이 아닌 시험을 아이들에게 보이고 싶었다. 시험에 대한 공포, 아이들 머릿속에 돌처럼 박혀있는 그 두려움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험, 친구들과 함께 답을 찾고 모르는 문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는 신나는 시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학교 시험은 친구와의 무한 경쟁이고 그래서 서열과 등급을 나누고, 일등이 모든 것을 가져가면 나머지는 루저가 되는 슬픈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고 싶었다. 시험이 끝나고 2교시에 아이들에게 당부했다. 너희들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수많은 문제들을 만날 것이다. 어려운 문제는 혼자서 해결하려 하지 말고 함께 풀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미술에서 강조하는 ‘조화의 아름다움’도 그것이란다. 제발 주눅 들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도전해라! 앞으로 미술 시간에는 남 눈치 보지 말고, 앉아만 있지 말고 움직여야 한다. 실패해도 좋다. 실험해라! 모험을 즐겨야 한다.

시험으로 시작한 첫 미술수업에서 가장 큰 소득은 올해 송탄중학교를 졸업한 다은이의 답안지다. 교사의 첫인상을 묻는 쓰기 문제에서 다은이가 보여준 재치와 솔직함은 단연 최고다. ‘축구하기 좋은 이마, 시선 강탈 눈썹, 순한 눈매, 복이 많이 들어올 것 같은 거대한 코, 앵두보다 더 앵두 같은 색이 없어도 촉촉해 보이는 생기 있는 입술, 웃는 듯 웃지 않은 묘한 표정, 동물들이 뛰어놀 것 같은 평화로운 숲과 흡사한 머리카락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문제에 주어진 <조건>을 완벽하게 만족시킨 주관식 답안의 혁신이다. 슈퍼대박퍼펙트 모범 답안이다. 예쁜 다은이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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