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힘들지만 내일의 희망을 위해 밭을 일군다”

[평택시민신문] 생산비는 높아지지만 채소 가격은 오르지 않아 어려움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농사의 즐거움


1995년 지방자치제의 시행으로 시(市)와 주변 군(郡)이 통합되면서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도농복합시가 탄생했다. 1995년 5월 송탄시·평택시·평택군이 통합된 통합 평택시도 국내에서 손꼽히는 도농복합도시가 됐다. 하지만 오늘날 농촌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가고 있고, 도시의 발전만이 평택의 주요 의제가 된 상황이다. 이에 <평택시민신문>은 도농복합도시로서의 평택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자 평택의 농업인을 소개하고 있다. ‘평택의 농업인’은 지난해 ‘농업인의 날’에서 대상을 받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10회에 걸쳐 소개한다.

인터뷰 제의를 받은 날로부터 인터뷰 전날까지 매일 밤잠을 설쳤다는 방홍열(66) 씨. “할 말도 없고, 말주변도 없는데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는 방 씨에게 농민의 순수함이 보였다. 그 순수함으로 방홍열 씨는 어려운 농업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밭을 일구고, 감사함으로 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서탄면 농업인후계자협의회장, 서탄면 새마을지도자협의회 회장, 서탄면 마을 이장 등을 역임했던 것도 농업과 농촌에 대한 순수한 애정 때문이다. 그런 그의 노력으로 방 씨는 지난해 평택시 농업인의 날에서 ‘유통‧소비 구조개선’ 부분 국회의원 상까지 받을 수 있었다.

이런 방홍열 씨에게 농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장관상을 받게 된 배경은?

친환경적으로 오이와 애호박을 재배하고, 이리저리 알아보며 채소 유통에 힘썼던 것이 지난해 평택시 농업인의 날에서 상을 받은 이유로 알고 있다. 남들보다 뛰어나게 무슨 성과를 냈기 때문에 상을 받았다기보다는 그저 할 일을 꾸준히 했기 때문에 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열심히 일을 했을 뿐인데, 이런 상을 받아 오히려 쑥스럽다.

 

농사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아버지가 농사를 지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농사일은 많이 했다. 그렇다고 본업이 줄곧 농사꾼은 아니었다. 농사를 본격적으로 짓게 된 시점은 8년 전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아버지를 이어 농사를 짓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생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지금은 14개 비닐하우스 3000여 평에서 채소를 재배하고 있다.

 

농업 환경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다. 이에 대한 의견은?

나 같은 경우는 인건비로만 한 달에 300만 원 정도가 들고, 비닐하우스 유지를 위한 연료비에도 꽤 많은 돈이 들어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건비와 연료비 등의 생산비는 높아지고 있다. 반면 채소가격은 오르지 않고 있다. 생산비는 높아지는데 채소 가격은 오르지 않아 농사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다.

채소 가격이 오르지 않는 것은 경제와도 깊은 관계가 있어 보인다. 사람들의 형편이 어려우니 수요는 줄고, 점점 하우스가 많아져 공급은 많아지니 제값 받고 채소를 팔기 어렵다.

평택에 음식점이라도 많아야 하는데, 거리를 나가보면 평택의 상가는 복덕방으로 가득 차 있다.

돈이라도 벌지 못하면 여가 시간이라도 많아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하다. 사시사철 농사에 관여해야 하기 때문에 연휴에 어디 고속도로에 차가 밀린다든가, 추석‧설날에 공항에 출국하는 관광객들로 가득 찼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먼 나라 이야기로만 들릴 뿐이다.

 

어려워도 농사를 손에서 놓지 않는 이유는?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농사를 열심히 짓고 있다. 오늘이 힘들어도 내일을 위해서 간다. 지나간 세월을 보면 그래도 농사를 통해 먹고 살았기 때문인 것 같다. 매번 빚만 지고 살았으면 아무도 농사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농사 그 자체는 배반을 하지 않는 것이 매력적이다. 노력한 만큼 땅은 인간에게 보상한다. 다만 수확한 채소들이 제 값을 받지 못하고 팔려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속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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