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경계에는 길이 있다

박경순 시인/사진작가협회 평택시지부장

[평택시민신문] 우리는 평생 살면서 몇 사람과 친분을 맺을 수 있을까? 이는 개인의 성향이나 환경, 그 밖의 여러 가지 요소로 현격한 차이가 난다. 학연, 지연, 혈연, 동호회 등을 통해 맺게 되는 관계는 사회성의 척도가 될 수도 있다. 호감을 갖고 서로 마음을 나누는 동안 그 친분의 정도는 깊기도 하고 우연으로 그치기도 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보편적인 현상은 새로운 사람을 사귀기가 점점 쉽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토요일 평택에는 여러 지역에서 모인 손님들이 섶길 코스 중에 하나인 명상길을 걸었다. SNS 상의 밴드를 통해 알게 된 모임이라고 했다. 집결지인 여선재 (명상길에 있는 음식점) 마당에 모인 이들은 안산, 용인, 수원, 분당, 서울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사는 곳과 나이, 이름이나 아이디(별칭)로 자신들을 소개했다. 남과 여의 비율에서 단연 여성의 비율이 우세했고, 연령대는 4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까지 아우르는 폭 넓은 모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의 구령에 맞춰 가볍게 준비 운동을 하며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몇몇 사람을 기다렸다. 한 도숙 섶길 위원의 평택에 대한 설명도 곁들였다.

여선재를 출발하여 신왕리 들길을 걷기 시작하자 삼삼오오 나뉘어 그동안 쌓인 회포를 푸는 듯 했다. 나는 그 분들이 모이게 된 가장 주된 목적이 궁금하여 물었더니, 걷는 것이 좋아서 모이게 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20 명이 모이기로 했다는데, 그날 모인 17여 명이 걷는데도 빈 들판을 가득 메운 듯 했고, 걷기 좋은 복장을 한 그 분들이 겨울 들판을 걷고 있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자니, 평택을 찾아 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훈풍이 감도는 것 같았다. 흔히 말하는 민간 외교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날씨는 찌뿌둥했지만, 12월 날씨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푸근했다. 평택의 인심이 사납지 않다는 첫 느낌을 안겨 준 듯 해서 마음이 놓였다. 평택의 역사가 깃든 곳에서 설명을 듣는 감흥은 제각기 달랐지만, 평택호 근처에서 각자 가져 온 간식들 - 군고구마, 떡, 수제 쿠키 등을 음료와 마시며 단체 사진에 담아 기념으로 남겼다. 밴드에 가입하여 함께 활동하자는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자신의 모습이 작게 느껴졌다. 조금 더 여지를 둘 수도 있지 않았을까. 좀 더 관용있는 태도를 보였으면 어땠을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새로운 사람을 사귄다는 건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아예 사귈 마음조차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오래 전 성행하던 인터넷 카페라는 공간이 있었다. 그곳은 예명이나 아이디로 접속하여 대화를 나누는 가상공간이었다. 그 당시에는 카페에 가입한 사람들에게 호기심이 많아 오프라인 상으로까지 만남이 이어졌었다. 한두 번 만나고 나서 왠지 더 이상 친해질 수 없는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더욱이 공통적인 관심사가 없어서 그런지 흐지부지 되었다.

근래에는 스마트폰의 활성화로 손 안의 세상이 새롭게 펼쳐지고 있다. 집 안에 모셔져 있는 컴퓨터가 아닌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도 소통의 수단이 편리해졌다. 그야말로 IT 강국으로서 소통은 더할 나위없이 자유로와졌다. 문제는 더 이상 사람 사귀기나 관계지향적인 면에서 호기심과 관심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날 모인 사람들은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모여서 걷고 대화를 나누며 사이버 상에서 맺은 친분을 현실에서 더 두텁게 쌓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걸어온 인생의 길이 가족을 위한 시간들이었다면 앞으로 남은 삶은 자신을 위해 시간과 열정을 쏟겠다는 의지와 함께 여유가 느껴졌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그 중심에는 ‘함께 길을 걷는다’ 는 명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면서 그들의 열정과 열린 마음을 보며 나이도 성별도 뛰어 넘는 만남의 장을 열어가고 있는 모습이 귀감이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봄이면 배꽃이 만발한 걷기 좋은 과수원길이 있노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며 섶길에 대한 홍보인지 평택에 대한 애정인지 모를 미묘한 충동을 느꼈다. 아마 걸으면서 온 몸에 밴 단순함과 가뿐함이 가져다 준 관용이리라.

사람은 길을 만들고 길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는 것을 몸으로 알고 명상하며 걷기 좋은 날이었다.

※외부필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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