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회 창립 90주년 기념 특별기획취재 ①

총무간사로 활동하며 민족주의·사회주의 계열 협력 통한 항일운동 전개 노력

일제식민지 교육 반대, 동양척식회사 농민수탈 규탄, 언론·출판·집회 탄압 규탄

일제의 지방행정 반대운동, 문맹퇴치운동, 미신타파 및 생활개선운동 등 전개

신간회 해소 이후 80여년…진정한 좌우 통합과 민족통일국가 수립 과제 여전히 남아

1927년 2월 15일 신간회 창립후 기념사진을 찍은 민세 안재홍 선생

국내 항일민족운동의 핵심인물 민세 안재홍

민세 안재홍은 우리고장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국내 항일운동을 이끈 핵심인물 중 한 명이다. 2016년 제7회 민세상 학술부문 수상자인 원로 사회학자 신용하 박사(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일제 강점기 해외 독립운동을 이끈 것은 백범 선생이 이끈 임정이었고, 국내 항일운동의 중심에는 민세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민세는 일제 강점기 때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고 끝까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의 길을 걸어간 인물이다. 사학자 천관우는 민세 안재홍의 이런 삶과 정신을 기려 “높은 절개를 지닌 국가의 선비”라고 평가했다.

민세 안재홍은 흔히 민족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아울러 언론인 및 사학자로, 해방 후에는 정치가이자 정치사상가 등으로 다방면에서 활동했으며 각 분야마다 당대 최고의 권위를 지킨 르네상스적 지식인이다. 무엇보다 그가 가진 매력은 9번의 투옥과 7년 3개월의 옥고가 보여주는 그의 실천성이다.

1927년 9월 25일 신간회 나주지회 설립행사에 참석한 민세 안재홍 선생

 

고향 부락산, 덕암산에 오르며 민족정기를 지키다

민세의 삶은 책읽기와 책쓰기, 그리고 목적을 가진 여행과 등산으로 가득하다. 국내에 안 가본 산이 없을 정도로 산을 좋아했다고 한다. 고향산인 평택 고덕 월명산, 인근 부락산과 덕암산, 안성 고성산을 비롯해 구월산, 속리산, 지리산, 무등산, 마니산 등 각지를 여행했고 글을 남겼다. 일본 유학중에도 100일 넘게 중국을 답사했고, 1934년에는 35일간 속리산에서 시작해 논산, 정읍, 고창, 순창, 구례, 여수, 진도, 목포, 나주에 이르는 답사를 다녀오기도 한다.

고향 평택의 서정리역과 서정리 시장은 민세가 경향각지를 오가며 자주 들렸던 장소들이기도 하다. 함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된 제자이자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 회고에 의하면 평택에 내려와 한글사전 간행 관련 후원금을 받고 돌아갈 때 서정리역까지 나와 배웅해주던 자상한 스승 민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미식을 좋아하지 않던 민세였지만 역에서 시간이 날 때 가끔 들러 국밥이라도 먹었을 역 앞 서정리 시장, 민세의 장남 안정용이 졸업한 서정리 초등학교는 해방 전에는 학부형으로 해방 후에는 신국가 건설의 구상을 위한 ‘시국강연’을 위해 들렸던 곳이다. 경부선 기차를 타고 남으로 내려가면 서 쓴 자신의 기행수필 ‘춘풍천리’에는 “밤에 한강물을 건너는 진위행 열차 도중에는 선로를 따라 있는 땅의 춘색을 엿볼 수가 있었다. 고향에 있는 집에 머문 하루 분묘를 돌아보다 쓸쓸한 할미꽃을 보았다. 복숭아꽃․ 살구꽃 , 개나리꽃 등은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려 하는 즈음이었다”고 적고 있다.

서울 종로2가에 있는 신간회 본부터

신간회 창립을 이끈 평택의 자랑 민세 안재홍

국내 독립을 이끈 민족지도자로서 민세의 업적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신간회(新幹會) 운동이다. 민세 안재홍은 신간회 창립의 핵심인물이다. 민세는 신간회 창립 당시 조선일보 주필로 벽초 홍명희와 함께 신간회 창립을 사실상 주도한 인물이자, 총무간사로 전국을 돌며 강연회 등을 통해 신간회 지회 조직 홍보에 힘썼다. 또한 신간회 기관지 역할을 한 조선일보에 신간회 관련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사설을 기고했고 신간회 해소를 끝까지 반대했으며, 해소 이후에도 ‘조선학운동’, 해방 후 '좌우합작운동', 납북이후 '통일국가수립운동' 등을 통해 평생 민공협동을 현장에서 실천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신간회 강령과 규약

일제 강점기 절대독립과 민족통합에 힘쓴 신간회의 민족운동을 기억하자

근현대사 역사교과서를 통해서도 익숙한 신간회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의 잔혹한 탄압 속에서 1927년 2월 15일 창립, 1931년 5월 16일 해소될 때까지 4년 3개월 동안 국내외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협동해 항일을 외친 일제 강점 최대의 항일민족운동단체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15일 오후 7시 서울YMCA 회관에서 이상재 선생을 초대회장, 권동진 선생을 부회장으로 하여 34명의 발기인했다. 신간회는 특히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일제에 타협적인 ‘자치론’을 배격하고 비타협적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하여 창립했다.

신간회는 1927년 4월 간도지회, 5월 동경지회 6월 경성지회 창립을 비롯하여 1928년 말에는 143개 지회로 창립이 이어졌다.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 창립을 주도하였으며, 순회강연회 개최, 일제식민지 교육 반대, 동양척식회사의 한국인 농민수탈 규탄, 언론·출판·집회 탄압 규탄, 일제의 지방행정 반대운동, 문맹퇴치운동, 미신타파 및 생활개신운동을 전개하였다.

신간회는 일제의 탄압 속에 1929년 6월 전국 복대표대회를 개최하였고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일제에 대해 학생운동의 탄압을 엄중 항의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지향한 민중대회를 열 것을 계획했다가 주요 인사 44명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신간회의 전국적인 활동에 위협을 느껴 신간회 중앙본부 및 지회 간부에 대한 투옥 수색 집회금지 등으로 강력한 탄압을 했고, 일제의 해소공작과 내부의 견해차이로 창립 4년만인 1931년 5월 16일 본부 전체대회에서 해소를 결정했다.

 

일제의 속박과 차별을 공유하며 공감과 포용의 폭을 넓힌 신간회

정치학자 정윤재 박사(한국학중앙연구원)는 2017년 6월 29일에 열린 신간회 창립 90주년 기념학술대회에서 “당시 신간회의 창립과 운영에 적극 참여했던 민족지도자들은 노선과 성향이 다양했지만 일제의 속박과 차별에 대해 공유했던 비판적 문제의식에 따라 ‘민족유일당’을 성사시키기 위해 상호 절제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면서 공감과 포용의 폭을 넓혔다. 단결을 모색하던 신간회와 그 구성원들의 성격을 특정 이데올로기(ideology)로 규정하기보다 ‘민주 공화주의‘라는 보편적 정치이념(political ideal)에 입각하여 민족차원의 모순극복에 동참했던 단체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본다“고 평가하고 있다.

신간회는 국내항일민족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고 민족운동의 고취와 고양에 노력하였으며 완전독립, 절대독립의 민족운동 노선을 견지한 협동노선으로 민족운동사에 커다한 발자취를 남겼다. 신간회 이후 좌우는 80년이 지난 현재까지 협동과 소통의 기회를 가져보지 못했고, 그래서 신간회의 경험은 앞으로 민족통일과 민족화합에도 중요한 현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평택을 신간회 운동의 성지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 지혜 모아야

민세 안재홍이 창립에 깊게 관여한 인연으로 2007년 2월 15일 민세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돼 신간회기념사업회를 창립했으며 현재까지 협동 사무국을 맡아 다양한 재조명 활동을 벌여왔다. 매년 2월 15일 창립기념식과 꾸준한 학술대회 개최, 신간회 논문집 발간 등이 이어졌고, 올해부터는 창립 90주년을 맞아 창립당시 기관지 역할을 했던 조선일보 등의 후원을 받아 대구광역시 교남YMCA 회관, 목포 청년회관, 천도교 서산 종리원, 하동청년회관 등 신간회 관련 전국 사적지에 표지석 건립 행사도 추진하고 있다.

평택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지혜 가운데 하나로 ‘신간회’ 활동을 홍보하는 것도 방법일수 있을 것이다. 신간회 활동은 우선 역사성과 사회통합이라는 미래 지향성 측면에서 평택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전국 대부분 지역에 신간회 지회가 설립돼 활동했기에 향후 자료의 정리 등을 통해 평택을 신간회 운동의 과거·현재·미래가 연결되는 도시로 만들어 나가는 것도 검토해 볼만 하다. 무엇보다 다른 지역에 없는 평택만의 자산이라는 면에서 ‘신간회’ 마케팅을 차분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고덕국제신도시 민세 생가 고택 내 민세역사공원에 지역정체성을 높일 수 있는 ‘민세기념관’과 함께 신간회운동의 성지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전략의 하나로 ‘신간회기념관’도 함께 조성해 지역시민들에게 자부심을 심어 주고 “각 길로 한곳에”를 외친 민세 정신을 미래에 계승해 나갈 필요가 있다. 일제 강점기 신간회 지회 설립을 위해 대구, 나주, 하동, 상주 등을 다니며 동분서주, 고군분투했던 안재홍과 신간회 통합정신이 평택에서부터 재조명 될 수 있도록 지역사회의 더 큰 관심이 필요한 신간회 창립 90주년이다.

 

글싣는순서

➀일제강점하 최대 항일민족운동단체 신간회창립의 주역 민세 안재홍

➁신간회 운동 국내 사적지를 찾아서1_대구시 교남 YMCA회관

➂신간회 운동 국내 사적지를 찾아서2_목포 청년회관

➃일본 도쿄지역 신간회운동과 항일 운동 사적지를 찾아서

➄일본 교토지역 신간회 운동과 항일 운동 사적지를 찾아서

➅신간회 운동의 민족과 사회통합 정신, 이렇게 계승하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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