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생각해보면 항상 일복이 많았던 인생”

대학교 학생운동, 신문사 마케팅, 농업법인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무

꿈은 바뀌어가면서도 성실한 삶은 지금도 진행형

한기원 농업회사법인 미래원 주식회사(이하 미래원) 영업관리팀장이 대학에 들어간 해는 1987년도. 사회 격변의 시기였다. “공부할 새 없이 사회운동을 해야 했다”고 말할 정도로 당시 대학가 주변은 학생운동 열기로 가득했다. 물론 그 열기에 동참하지 않은 학생들도 있었지만, 한 팀장은 “시대를 외면할 수 없었다”고 담담히 이야기를 전했다. 이러한 환경은 한 팀장이 사회에 대해, 정의에 대해 생각하게 했고, ‘어떻게 하면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갖게 만들었다.

이러한 대학생활 이후 한기원 팀장은 지역사회의 시민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계를 꾸려나가면서도 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해 선택한 것이 <한겨레신문> 평택시 지국이었다. 한 팀장은 “당시 <한겨레신문> 지국들은 단순히 신문 판매를 위해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독자를 늘려나가며 건전한 언론의 확대를 도모하기 위해 존재했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면서 경제적으로 안정될 수 있다는 생각에 평택시 지국의 지국장을 맡아 운영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지국을 운영하면서 현실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한 팀장에 따르면 당시에는 ‘신문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본사의 지원 뿐 아니라 한 팀장도 대출을 받아가며 공격적으로 판촉을 시작했다. 그 결과 처음 지국을 운영할 때 500부 독자를 확보했던 평택시 지국이 2000부까지 독자를 늘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메이저 신문과 다르게 <한겨레신문> 지국은 신문 광고전단지 수입이 미비했기에 독자수가 늘어나도 경영의 어려움은 그대로였다. 또한, 판촉으로 구독신청을 받았던 구독자들이 1년이 지나면 구독을 해지하는 경우도 허다해 지속적으로 개인 자금으로 판촉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렇게 10년을 <한겨레신문> 평택시 지국을 운영한 한기원 팀장은 처음 생각과는 달리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지 않고, 시민사회운동에도 참여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지국을 떠났다.

이후 한 팀장은 <평택시민신문>의 마케팅을 맡아 어느 정도 성과를 냈지만, 언론 영역의 일에 실증이 나 3년 만에 퇴직하고 선택한 새로운 영역이 농업분야였다. 한기원 팀장은 “포승의 ‘햇살들농원’에서 함께 하자고 했을 때, 농업 분야의 비전을 발견했다”며 “2007년부터 2010년까지 햇살들농원에서도 정말 많은 일을 진행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전했다.

2010년부터는 미래원의 마케팅 부서에서 일을 시작했다. 미래원은 평택시 진위면에 위치한 기업으로, 샐러드 채소를 직접 생산, 가공, 유통하고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큰 식물공장을 갖고, 농업법인 중 매출이 안정적인 기업으로 손꼽힌다.

한편, 한기원 팀장은 “어디를 가나 일복이 항상 있는 것 같다”며 이곳에서도 마케팅, 영업과 관련한 각종 업무를 맡아 왔다고 전했다. 한 팀장이 처음 입사했을 때 연매출 80억 원이던 회사가 2016년 기준으로 266억을 기록하며 6년여 만에 3배 넘는 성장을 기록했다. 그 성장 속에 한 팀장의 역할이 있었기에 회사에 대한 애정이 넘쳤다.

지금은 다른 업종에 종사하고 있지만, 신문사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다. <평택시민신문>의 발전을 위한 조언을 청하자, 한 팀장은 “<평택시민신문>의 기자가 너무 자주 바뀌는 것 같다. 기자들의 취재원이 신문사의 자산이라는 점에서 기자의 잦은 변경은 신문사의 자산 축적에 장애물이 된다”며 “취재원은 독자이면서 광고주가 되고, 오피니언리더이기 때문에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기자가 오래 근무해야 신문사의 경영이 튼튼해질 수 있다”고 전했다. 또한 “지역단위마다 건전한 여론을 형성하는 지역신문이 필요하다. <평택시민신문>이 그러한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건전한 사회를 만드는 신문사가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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